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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다가오는 기별을 들을 수 있을까? 
아무도 묻지 못한 질문을 공들여 조형함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지금의 무늬(人紋)는 오랜 과거와 먼 미래를 잇는 진화의 율동에 어떻게 조응하고 있을까? 
물질과 의식과 언어의 임계를 넘어 쉼 없이 나아가는 인간의 정신사를 ‘집중’으로써 통으로 조망할 수 있을까? 
생명체 중 유일하게 자기 초월의 좁은 길에 들어선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영혼’의 자리는 어떻게 갱신될 수 있을까? 
놀라운 이 생명과 정신의 도정에서 ‘공부’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시공간 속에서 구원의 소식이 될 수 있을까? 
  
‘인간만이 절망’이라고 했건만, 그 인간의 정신에 빛이 깃들 수 있는 희망을 살폈다. 
현실에 터하면서도 그 현실성이 가능성과 어울리는 길목을 더듬었다. 
우주와 세상의 변화 앞에서 자기 생각을 낮추며,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더불어 ‘되어’가고자 애썼다. 
                                                                                                                           
                                                                                                                                    「집중과 영혼」 서언


새 존재의 초승으로

생활은 적어야 합니다. 분방(奔放)하고 번란해서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적은 자리, 잊힌 곳, 혹은 빈 터에서야 비근(卑近)한 일상에 얹혀 있는 갖은 갈피와 흔적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로써 철학적 실천이 자연스레 생깁니다. 이 철학은 작게 시작되지만, 제 이름을 지닌 책임있는 사유의 방식입니다. 그 씨앗은 작아도 떳떳하므로 길고 깊은 세계를 기약합니다. 이른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전망이지요.

담박한 생활과 비근한 사유의 집심은 오직 낮은 중심에서 생깁니다. 철학적 주체는 그 중심을 낮춤으로써 학인(學人)의 차원을 얻습니다. 종이 위에 핀 꽃이 새 존재의 초승과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