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이었던 것 같다. <속속>공부에 합류했고 6개월 후 연말, 선생님께서는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동안 속속에서 배운 것을 발표하는 시간을 주셨다. 얼마 전, 발표를 위해 썼던 3년 전 글을 필기 노트에서 발견했다.
*
속속에서 배운 것 (2017년 12월 22일)
글로 정리해 보았는데요, 잊지 않고 붙잡기 위해서, 아직 제 것이 되지 못한 것들까지 포함시켰기에, 양해를 구합니다.
1. 속속에 오기 전,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깜냥껏 찾아간 곳이 '심리/상담'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배운 언어는, 얼마간 유용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얼마간 허전하기도 했는데요. 속속에서 공부할수록 서서히 뚜렷하게, '심리주의적‘ 언어의 맛을 잃고 있었습니다.
2. 속속 공부를 통해, 인간 됨의 실천으로 '약속' 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의와 변덕으로 약속을 미루던 버릇이 불편해졌고, 고치고 있습니다.
3. 훈육 받지 않으려는 '어른'이지만, 버릇과 싸워, 버릇을 넘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훈육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4. '틀/형식'을 통해야 하고, 반드시 묶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 생활에서 몇 가지를 묶어 보았습니다(새벽예배, 돈, 옷). 어느새 어떤 버릇에서 멀어져있는 걸 알아차리기도 했습니다(패스트푸드).
5. 어떤 ‘앏’은 앎의 주체(존재)가 바뀌어야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6. '정이 아닌 신뢰', '깜낭을 키우는 공부- 특히, 깜냥이 키워질 수 있는 것', '달인/성인'이라는 방향성(존재론적 지향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힘든 것이지만, 절대적 비용과 함께, 안팎의 분리가 안 되는 지점, 마침내 자기 삶을 책임지는 지점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고, 힘이 닿는 데까지 가보고 싶었습니다.
7. 중요한 명제는 암기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암기하지 않으면 돌로 남고, 암기해야, 벽돌이 되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이 선배님처럼 제게도 암기노트가 생겼습니다.
8. 벌써 영악한 아이, 여태 그악스런 노인, 싸이코 패스, 이영학까지. 그들에게서 자신을 적발해야 하는 불편함에 서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물화' '싸이코패스와 장인의 조각성', '재유입 - 장의 퇴행 - 복합성 '잠깐 열리는 자유' '장소화' '개입' '연극적 실천' '응해서 말하기' '집중' 3의 공부' '존재론적 겸허' '알면서 모른 체하기' '내용이 없는 형식' '의식 진화론의 관점' 등의, 이전엔 알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개념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9. 사린 (사물, 동식물, 귀(신), 사람)과 '이미 언제나 존재론적 개입을 하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10. 모든 발화가 '행行'이고, 개입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11. 질문이 '문門'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의 인생은 대체 무슨 일인가...?' 란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12. 변명에 대한 대응으로, 낭독을 하게 되었고 지속하려 합니다.
13. 청소의 노동이 소중해졌습니다.
두 달 전쯤, 속속 모임에 다녀온 다음 날 일요일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무심하게, 성가곡을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가사가 이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좋게 하시죠, 좋게 만드시죠” 그 순간, 제 마음에 분명하고 또렷하게 떠오른 말이 있었는데요. '우리가 신을 좋게 하는 거지'라는 말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 속속 공부를 통해, 변하지 않으려는 힘과 변하고자 하는 힘이 경합하며, 자주 몸이 긴장 상태가 되었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제 삶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속속>이라는 틀로 얻어진 것들이기도 해서, 이 틀이 없으면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
알지 못한 채 발화된 말들도 있지만, 이 말들은 어떤 분열을 모른 체하며 ‘나보다 더 큰 나’를 향한 행行이기도 하다. 처음에서 지금, 이 말(들)은 얼마나 몸을 얻어 갔을까, 다행히 ‘재서술’ 되는 말이 생기기도 했고 변명이 되거나 잃어버린 말들도 있다.
최근의 공부. 최근 속속에서 ‘스스로를 돕는 지혜를 통해서 남도 도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爲己之學’의 공부라고 하셨는데, 이제야 이 말이 조금씩 들어온다. 먼저 스스로를 돕기. 몸을 돌보고, 몸과 마음의 분열을 잇고, ‘꼴’이 원하는 것 말고 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알아보고 가져다주려는 쪽으로, 에너지의 방향이 또다시 변침하려는 중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몸’을 돌보는 것인데, 그런 감각이 없으니 일단은 모방을 하면서.
그때보다 지금, 스스로 설 수 없다는 조건과 한계가 더 잘 보이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를 돕기 위해 공부를 선택했고 여전히 <속속>이라는 공부의 틀을 의지하고 있다.
나는 가끔 이 공부의 틀이 하고 있는 일이 신기하고, 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