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große Frage, die ich trotz meines dreißigjährigen Studiums der weiblichen
Seele nicht zu beantworten vermag, lautet: "Was will eine Frau eigentlich?"
(내가 30년간이나 여성의 정신을 연구하면서도 아직 답할 수 없는 큰 질문은 이것이다:
"여성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What women want :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실은 프로이트의 위의 문장에서 나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남성은 광고기획자로 우연한 기회에 여성의 속마음이 들리는 환청을 경험하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한다.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프로이트도 알 수 없었던 여성이 원하는 것을 당신은 알 수 있다며, 새로운 기회로 활용하도록 권유하고 주인공 남성은 여성의 속마음이 들리는 마법을 통해 일에도 성공하고 사랑도 얻는다는 내용이다.
프로이트가 여성이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에서처럼 만약 여성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면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성들은 때때로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고백을 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은 중층적이어서 마음을 안다고 해서 그 정신을 이해한다고 하기 어렵고 또, 속마음(好惡)을 안다고 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마음, 의도는 오히려 미끼와 같은 것이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은 내 ‘존재’와 어긋나는 세속에서 여성 스스로도 자신이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길은 멀기 만하다. 이 글에서는 ‘여성이 원하는 것’을 알기 어려웠던 이유를 여성이 처한 사회적 자리의 역사성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떠나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자리를 만들어주어야만 한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 의존적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으로 나타나는 사회이며, 지위나 역할 또는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사회이다.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종종 노예의 자리로 비유되곤 하는데 그 이유는 노예와 여성은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는 타인 앞에 현상할 수 없고 타인은 그의 앞에 현상하지 않는다. 노예에게 온전한 이름이 없다는 것 또한 여성의 자리와 유사하다. 노예는 주인과의 사적인 관계를 통해서 사회와 연결되고 여성 또한 남성과의 사적인 관계를 통해 사회와 연결된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세계관은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공간적인 차원에서 여성은 안을 남성은 밖을 할당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가부장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여자에 대한 혐오 담론 속에서 확인된다.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고, 여성부를 비롯하여 페미니즘에 의한 역풍으로 성별 역차별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아직도 여성의 바깥활동은 저물기 전에 돌아와 밥을 해놓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만두기를 강요받고 있다.
이처럼 여성의 사회적 자리는 사적영역에만 국한되어왔으며 기혼여성의 경우 결혼과 동시에 친정에서는 외인(出嫁外人)이 되어 돌아갈 자리마저 사라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명예를 갖고 시집과 혈연관계로 이어지는 길은 아들을 낳음으로써 가능했던 그런 시대를 지나 지금은 기혼여성도 집안의 남성과 동등한 재산권과 성원권을 갖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앞에서 간략하게나마 여성이 처한 사회적 자리의 역사성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여성은 자기 자신을 사회 속에서 현상할 수 있어야 하며, 여성의 활동적인 삶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여성의 사회적 자리가 여전히 공간적인 차원에서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이 글에서는 주장하고 있지만 안과 밖을 분리시키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한 것처럼 남성의 공적 세계와 여성의 사적 세계를 분리시키는 이러한 논의가 남자(아들)는 권력, 여자(딸)는 무권력이라는 공식을 정당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따라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rivate is political)라는 페미니즘의 오래된 명제를 들고 오지 않더라도 공과 사를 극명히 구분 짓는 것은 억압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에 동의하며, 여성의 개인적인 경험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여성의 경험은 한낱 사적인 경험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공간은 남성에게는 ‘안’으로 여겨질지라도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양식과 자신의 내적인 요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그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알기 어려운 분열의 상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사회적 자리가 ‘안’과 ‘밖’ 공간의 구분 없이 더 많아져야 하며 여성은 스스로 ‘밖에서’ 자신이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지라도 더욱 자신의 활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럴 때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여성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