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_ 외출1
- 아직은 순박했던, 1990년대를 연상시켜 이질적 공기를 만들어낸 그 커피숍을 나오며 떠올린 물음은 내가 다시 그 커피숍을 갈수 있을까? 였다. 그 공간에 다시 발을 들여놓음에 왜 남다른 결정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내 감성은 왜 그 공간을 이질적이라고 접수해 버린 것일까???
- 언젠가 『월든』을 통해 소로우(1817~1862)의 삶을 엿보면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톺니바퀴 속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던 자신을 알게 된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나름 아파트(집)를 소유하지 않음으로, 나름 대형마트 보다 동네 슈퍼를 애용함으로, 나름 웬만한 거리는 차가 아닌 자전거를 이용함으로, 휘몰려가는 세상에 끄달리지 않으려 애써왔던 실천들이 이미 그 시스템 안에서의 운신일 뿐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 인간의 무의식은 타자의 언어로 되어 있다던 라캉의 말처럼 내 무의식이 타자의 말로 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말과 함께 자본의 말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인간의 정리情理조차 단박에 메뉴얼화 시켜 상품으로 등록해버리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정체성이 소비자라는 사실에 ‘첫 번째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 지목된 정체성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의 소외를 감내해야하는 것은 또한 자신일 뿐이다.
- 세상의 말이 온통 특정의 말들로 도배되었을 때, 서로 맥락 지어진 그 말들은 인간의 의식을 장악한다. 장악된 의식은 그 말이 의도한대로 세상을 표상한다. ‘나는 조금 다른 말을 가졌어’라고 확신하며 방구석에서 대양의 고래를 잡던 인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제 안에 표상되어진 심리, 정서, 혹은 의도 등이 타인을 만남과 동시에 세상에 도배되었던 특정 말들로 전유되어 버린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흔히 겪는 오해로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해를 피하지 못하고 굴절毁折되어 버리는 언어환경 속에서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는 연대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