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그 비워진 중심
'세 그루 집'(김재경) 평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은 오히려 그와 관계 맺고 있는 타자를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다. 나의 인식 또한 마찬가지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내 인식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인식의 지평은 알 수 없는 타자의 심연으로 나를 내던진 만큼, 치열하게 통과한 만큼 확장된다. 여기서 소환해 볼 수 있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은 타인의 작업을 감상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작업을 매개삼아, 건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흔들고 그 지평을 넓혀가기 위한 장이 되어야 한다.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이미 진부한 사계(斯界)의 말이 되었다. 알 수 없는 타자의 세계가 이상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나의 눈을 그의 관점과 비교·대조해보고, 새로이 균형을 잡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봐야 한다. 경험에 얹힌 직관은 사태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주기도 하지만, 타자를 죽이는 냉소가 되기도 한다. ‘진짜(authentic)’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부 깨달은 자의 경지일 것이다. 대부분 앎은 사후적으로 다가온다. 앎의 의미를 담아낼 만큼 깜냥을 키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한눈에 밀쳐버리지 않을 것, 일부를 전체로 오도하지 않을 것, 하나의 허물을 캐묻기보다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볼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암흑에서도 지혜를 구하는 학인의 자세일 것이다.
건축가 김재경의 <세 그루 집>은 이상한 집이다. 집이라기보다 전시장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집’이 아닌 집을 두고 냉소하지 않기 위한 다짐의 말이 필요했다. 비평에 앞서, 여러 말을 늘어놓은 이유다. 자작나무 합판을 CNC로 재단하여 만든 세 기둥과 지붕구조물은 이 집의 거의 전부다. 나무모양의 기둥은 넓지 않은 실내 이곳저곳을 점유하고 있어 공간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주방이나 화장실 등 부속공간은 건물 전면에 몰려있고 폭도 좁아 제 기능을 다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 큰 문제는 2층 침실공간이다. 왼쪽, 오른쪽을 서로 엇갈려 놓은 계단은 올라가기 어렵고, 이리저리 뻗어나간 지붕구조물은 쉽게 머리에 닿아 허리를 굽혀야만 움직일 수 있다. 비좁은 누울 공간과 커튼 하나 걸 수 없는 창문도 문제다. 건축가는 스스로 ‘집’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과도한 작가주의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집’에 관한 오래된 관념과 싸우며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세 그루 집>을 매개 삼아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물음(혹은 의혹)은 무엇인가?
증상
건축가는 다른 작업보다 <세 그루 집>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건축적 정향이 <세 그루 집>에 가장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내세운 화두다. 요즘 젊은 건축가들과는 달리, ‘전통’이란 무거운 주제를 작업의 모토로 삼았다. 전통건축의 공포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목구조 결구방식을 고안하고, 나무가 가진 재료의 특이성과 새로운 구축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했다.
한국건축의 증상가운데 하나는 강박적으로 ‘전통’을 찾는 것이다. (건축가 김재경 또한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전통에 천착하게 된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자의식을 전통에서 찾는 것에 의문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만 인간일 수 있고, 사회는 동질한 문화로 얽힌 공동체 집단 혹은 영역이다. 전통은 이러한 문화의 핵심이기에, 인간이 자기정체성을 전통에서 찾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전통을 맹신하는 자세 또한 경계해야 한다. 현대에 들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전통이 동원되곤 했기 때문이다. (시대별로 강조하는 역사인물이 변해왔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박정희가 체제의 홍보 도우미로 이순신과 김유신을 번갈아 등용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전통이 사실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다. 진정한 전통은 되짚어 보고, 뒤집어 보며, 해체해 볼 때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전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고, 녹록한 것이 아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건축이 전통을 대하는 자세다. 건축을 ‘물리적 구성물(을 만들기 위한 계획)’로만 간주하는 오도된 관념 때문인지, 전통을 구체적이고 고정불변의 ‘무엇’으로 간주해왔다. 전통건축에서 형태를 차용하고(70~80년대), 주거 형식(공간 구조)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90~00년대), 요즘은 한옥을 전통의 표상으로 삼는다. 50여년이 넘도록 해묵은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합의는 소원해 보인다.
해답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증상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증상은 살기위한 일종의 자기표현이다. 증상을 포기하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증상을 반복하며 삶을 연명할 것인가. 환자는 ‘대리만족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만족감을 주는’(브루스 핑크) 증상을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반복된 증상이 주는 만족감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 만족감 속에 은폐된 무의식은 무엇인가?
전통건축?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에서 일본인의 의식(정신)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어의 3종 표기법(가나, 가타카나, 한자를 동시에 표기)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한다. 하나의 문자 체계 내에 세 종류의 다른 표기법이 공존하는 언어는 일본어가 유일하다. 일본어는 외래어를 일본 고유어(히라가나)로 번역하여 쓰지 않고, 또 다른 외래어인 한자나 번역된 글자를 의미하는 가타카나로 표기함으로써 외래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외래어를 번역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외래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야성(野性)’을 거세하고 내 나라 언어의 맥락 속에 배치하기 위해서다. 원래 내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무의식)은 번역을 통해 억압되고 은폐되어야 하나, 일본어는 이와 반대인 것이다. 억압의 배제, 즉 거세되지 않았으므로 무의식이 드러나 있다.
고진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어는 무의식을 완벽히 가린 언어다. 타자의 언어를 억압하고 있다. 대다수의 한글이 한자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한글로 표기되는 순간 그 사실은 완벽히 은폐된다. 순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어원을 명확히 찾을 수 있는 영어와 달리, 순우리말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들다.
건축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건축은 서양으로부터 수입된 학문이고, 일본의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원은 ‘건축’이란 글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은폐를 넘어 억압의 강도를 높이려는 것일까? ‘전통건축’이란 모순된 조어가 널리 쓰인다. 건축은 분명 서양의 것이고,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체로 나선지 반세기가 조금 넘은 분야다. ‘전통’이란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건축이란 체계화된 학문은 수입된 것일지라도 건축은 근본적으로 ‘거주의 술(術)’이므로, 과거 집짓기를 의미했던 ‘영조(營造)’와 어느 정도 공통분모가 있을 거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건축과 영조는 서양과 동아시아라는 서로 다른 문화와 인식 구조(에피스테메) 속에 자리하고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건축은 서양이란 타자를 깊게 통과하며 어렵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전통건축은 건축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통건축은 건축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한다. 전통건축과 건축의 차이를 통해 건축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통건축’이라고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건축인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을 다수가 쓰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쓰면 맞는 말이 된다.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행동 뒤에는 불안이 있다. 때때로 상징계 밖으로 출현하는 무의식은 도덕적인 사회(니체는 도덕을 ‘눈치 보기’라 했다)를 사는 한국인에게 마주하기 두려운 일일 것이다. ‘전통’을 찾는 일, ‘전통건축’이라는 모순된 말을 의심 없이 사용하는 것은 ‘건축은 수입된 학문’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무의식적 반작용이다. 전통을 주제로 한 건축 수업이나 강연에서, 건축의 기원을 묻는 질문에 전통건축을 전공한 학자가 보이는 신경증적인 반응은 당연해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 ‘나는 없다’는 대답을 아픔 없이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동아시아 문명의 원류인 중국과 한 때 제국을 꿈꿨던 일본 사이에서 한국은 언제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물어야 했다. 무너진 자존감을 세우는 데 전통건축만큼 좋은 본보기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알아버린 진실(전통건축은 ‘건축’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면서도 모른 채해야만 살 수 있는, 바로 보기 힘든 문제가 되었다. 은폐와 외면을 통해 잠시 동안의 위안을 찾는 것, 전통을 강박적으로 찾는 증상 이면에 자리 잡은 한국건축의 암면이다.
비워진 중심
그렇다면 진정한 ‘전통’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에서 고진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일본인은 외국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잡거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심에 두지 않는다.’의 의미는 ‘이미 정해진 중심이 있기 때문에 외부의 것은 주변에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늘 중심을 비워둔다’는 말이다. 위의 논의에서 무의식이 드러나 있는 일본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주체는 무의식의 억압을 통해서만 형성된다(상징계로 진입한다). 일본인은 무의식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무의식을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주체’가 없고, 주체가 없으니 ‘중심’도 있을 수 없다. (개인보다 사회나 공동체를 우선에 두는 일본인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사회를 ‘무책임의 체계’라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명확한 주체의 부재’, ‘중심의 부재’를 의미한다.
무언가를 배울 때, 그것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중심이 있다는 것은 한 주체의 판단근거가 되는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관념은 포착한 재물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자신의 체계의 틀에 맞게 깎고 재단한다. 거세하는 것이다. 중심이 없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고진의 예를 인용해본다. 일본인은 한자를 음과 훈(뜻)으로 읽는다. 한자를 훈으로 읽는다는 것은 한자를 단순히 발음기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본질(뜻이자 무의식)을 드러내는 기표로 보는 것이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기화하는 일본어의 특이성이다. 외래적인 것을 “내부로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항상 외부”에 두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조선에서는 “한자는 음만으로 읽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외부적”이었고, “문자를 읽고 쓰는 지식계급은 중국인에 필적하는 한문을 쓰려고 했다.” 한자의 본질(의미)은 거세하여 은폐하면서도 중국을 배우려했던(중국인이 되려했던) 것이다.
탈아입구(脫亞入球)를 표방하며 ‘지면 배운다.’고 했던 일본은 현대화의 시기, 많은 수의 지식인을 서양에 보냈다. 그리고 절실히 배웠다. 서양을 배우면서도 그들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비워진 중심’이야말로 지금의 일본을 있게 한 유산이자 ‘전통’이다. 전통은 시원(始原)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이 아닌 이상, 누구도 시원을 가질 수 없다. 제국의 제도를 차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뿐이다. 전통의 핵심은 타자의 것을 얼마나 잘 배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있다. 일본이 ‘장인’의 나라인 이유다.
건축에도 ‘비워진 중심(voided center)’을 작업의 주제로 삼았던 건축가가 있다. 우리에게 미답의 건축가로 남아있는 존 헤이덕(John Hejduk)이다. 그는 자신을 미국인이라 소개하지만, 건축의 고향은 유럽이라 말했다. 이는 ‘건축의 본류는 유럽’이라는 진부한 자기소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헤이덕은 유럽의 건축을 머리가 아닌 몸(visceral)으로 통과했다. 모든 이가 현대건축(modern architecture)의 ‘공간’을 이야기할 때, 헤이덕은 서양건축의 모국인 이탈리아건축에서 ‘분위기(undertone)’를 포착했다. 르코르뷔지에의 ‘스타일’이 ‘국제주의양식’이 되어 전 세계가 동일한 형식을 답습할 때, 헤이덕은 르코르뷔지에의 도면을 ‘그림’으로 읽고 그대로 외워버렸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른다’는 한없이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돌려세우는 ‘계몽된 무지’(쿠사누스)가 바로 ‘신비(mystery)’로 가득 찬 헤이덕의 건축을 만든 자양분이다. 누군가에게는 건축의 문외한이라 폄하할 만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지만, 누구보다도 ‘진정한 건축(authentic architecture)’을 추구했던 헤이덕에게는 서양건축의 본질을 본디 그대로 내재화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론이었다.
아마추어
건축가 김재경은 <세 그루 집> 발표에 앞서, 몇 년에 걸친 동아시아 전통건축 답사와 공포형식에 대한 연구결과물들을 보여주었다. 이 결과물의 변형이 <세 그루 집>의 목구조 형식이다. 하지만 이 집을 보고 전통건축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전통건축에서 공포는 밖으로 뻗어 나온 처마를 지지하기 위한 실외 구조물인데 <세 그루 집>은 이를 실내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일반적이고 당연해 보이지만, 전통건축을 고정된 형식으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형식을 형식으로만 환원하는, 동일한 차원으로만 이동하려는 사고 또한 문제다. 헤이덕은 ‘건축은 추상에서 시작해 구상(현실)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두 차원인 추상과 구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작업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다시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반복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건축’이다.)
건축가는 전통건축에 대한 지난한 연구와 변형과정을 보여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전통건축과 이별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한 분야를 철저히 통과한 전문가(profession)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공든 탑은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피땀 흘려 탑을 쌓아본 사람은 스스로 허물 줄도 안다. 쌓는 과정을 통해 가능성 이면의 한계가 보이고, 또 다른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건축가 김재경이 관념 속 전통건축이 아닌, ‘진짜 전통건축’을 찾아가는 시점은 바로 이때부터다.
자신이 조형한 스타일(style)에 붙박여, 그 스타일이 오히려 자신을 옥죄고 고립시키는 형국이 되어가는 사례는 많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자신의 스타일과 범주 안에 머문다.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문’(專門)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전문가는 자신을 한계 짓는 범주를 허물고 더 넓은 세계로 외연 확장을 시도한다. 관계없어 보이는 분야와의 이종결합도 개의치 않는다. 프리츠커상을 받은 중국의 왕슈(Wang Shu)는 이런 ‘진짜’ 건축가다. 누구보다도 성공한 전문가이자 건축가인, 왕슈의 사무소 이름은 의아하게도 ‘아마추어 건축 작업실(Amateur Architecture Studio)’이다. 그가 스스로를 ‘아마추어’라 부르는 이유는 현대 테크놀로지의 세례 속에서 “전문화되어 영혼이 사라진 건축”에 저항하고, 지역(vernacular)의 전통과 장인들로부터 배우려하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의 발전은 건축가를 여러 가지 책무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건축가의 영역이 세분화되면서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의 요구에 세밀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찬란함 이면에는 암면(暗面)이 있기 마련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영역 구분은 ‘건축’을 기술과 공학으로 여기는 세태를 낳고 있다. ‘통합적 조감력’(k님)으로 건축을 보지 못하고, 근시안적 전망만으로 ‘도면 그리는 원숭이(CAD monkey)’가 되어가고 있다.
건축은 무엇보다도 ‘체계를 쌓아가는 일’이다. 건축가 왕슈는 모두가 첨단의 도시를 동경할 때 그가 몸담은 지역의 콘텍스트(context)로 눈을 돌렸다. 현대의 도시화는 모든 것을 편평하게 균질화했지만, 도시 밖 교외에는 여전히 능동적으로 환경과 조응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야성을 잃지 않고 지역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전해오는 토착민의 생활양식과 장인의 솜씨는 독특한 왕슈 건축의 원천이다. 토착성과 장인이라는 ‘무체계의 체계’를 동력삼은 그의 스타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생명체와 같다.
새로운 가능성
전통건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트러스(truss)’가 없다는 것이다. 직선부재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선부재를 핀 접합으로 결합시킨 트러스 구조는 동아시아 전통건축에서 찾아볼 수 없다. 전통건축의 목구조 결구방식은 짜 맞춘 것(가구식)이기는 하나, 트러스의 강한 결합방식과 비교해 볼 때 쌓아올린 것에 가깝다. 특히 공포가 그러한데, 주두, 첨차, 소로로 이어지는 공포는 목재의 두께만큼 엇갈려 쌓아놓은 것이다. 외부적으로 화려함을 더하고자 하는 의도에 부합할 수는 있으나, 처마 길이를 확장하고자 하는 본디 목적에는 지나치게 크고 무겁다. <세 그루 집>은 공포의 전통 결구방식을 따르면서도, 기본부재의 변형(첨차와 살미를 엇갈려 쌓는 방식에서 삼각형 단위부재로의 변형)을 통해 합리적이면서도 가볍고 강한 결구방식을 고안해 냈다. 형식의 재현이 아닌, 형식의 재발견인 것이다.
서양건축의 역사는 석조건축의 역사다. 철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modern era)의 일이다. 이에 반하여 동아시아건축은 현대 이전까지 목조건축이 주를 이뤘다. 석재나 철재와 비교해볼 때, 목재는 구조적 성능이 떨어지고 화재에 의한 소실 위험이 클 뿐만 아니라 물에 의한 변형에도 취약하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건축 재료로 사용된 것은 탁월한 현장 시공성과 가공성 때문일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재료의 본성을 잊게 한다. 압축력에 대응하는 석재는 조적식 구조에, 압축력과 인장력을 동시에 대응하는 철재는 트러스 구조에 적합하다는 정형화된 논리는 점점 낡은 도식이 되어간다. 현대건축의 총아, 철근콘크리트에 밀려 불합리한 건축 재료로 인식되던 나무는 대표적인 친환경 소재가 되었다. 더 나아가 목재로 고층건물을 세우고, 대공간의 구조물을 짓는다. 나무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다. 재료의 본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아직 실험 단계이기는 하나, <세 그루 집>도 대공간의 구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목재로 구현한 대공간은 이미 여럿 있으나, <세 그루 집>과 같은 전통 결구방식의 재탄생을 통해 이를 구현한 사례는 드물다.)
건축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텍토닉과 재료는 늘 건축의 주된 요소였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목재의 구축방식에서 찾은 건축가 김재경은 건축의 근본을 따르는 자다. 그가 한국건축의 전통을 찾아 수행한 그간의 노력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형식화된 전통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야 한다. ‘소망이미지’(발터 벤야민)가 예시하듯, 오히려 내가 아는 전통의 형식과 결별할 때(비틀고 어긋낼 때)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어제의 전통을 구현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오늘을 사는 전통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은 오직 ‘진짜’가 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