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 Simmel, 1958~1918> (1-7)

by 찔레신 posted May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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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경제 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인격성과 사물의 관계 사이에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화폐경제에 의해 해체된다. 화폐경제는 인간과 일정한 특성을 지니는 사물 사이에 매 순간 완전히 객관적이며 그 자체로 아무 특성도 없는 돈과 화폐가치를 삽입시킨다..이처럼 그 자체로 아무런 인격도, 색채도, 특성도 지니지 않는 덕분에 돈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었다. 돈은 모든 도구 중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다(Geld ist die reinste Form des Werkzeugs.)


2.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이 그토록 찬양해 마지 않던 중세 봉건시대 또는 자의적인 결사체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들 사이의 연결 관계를 창출한 것은 궁극적으로 돈이다...돈과 더불어 직접적인 상호 이해의 토대가 마련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행위 규정들이 제정되었으며, 이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에 대한 표상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에 틀림없다...돈은 원천적으로 어떤 순간에도 추구할 수 있는 절대적 목표가 된다. 마찬가지의 이치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3. 니체는 개인의 처절한 투쟁이, 사회주의자들은 일체의 경쟁의 제거가 개인이 완벽하게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본 것 같다. 어느 경우든, 그 근본적 동기는 다름 아닌 사회적, 기술적 메카니즘 속에서 평준화되고 소모되는 데 대한 개인의 반항이 그것이다...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인데, 이는 외적, 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불안하게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 러스킨이나 니체 같은 인물들이 대도시에 대해 느낀 깊은 증오는 여기서 설명된다. 이들은 도식화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 삶에서만 삶의 가치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들은 대도시를 증오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화폐경제의 지성주의적 상태를 증오한다. 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보는 가치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가공할 만한 평준화 기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불가능성을 가치 없이 없애버린다.



4. 裝身具라는 미적 형상물에서 사회학적 상호작용, 즉 자신을 위한 삶과 타인을 위한 삶의 각축장에서 나타나는 두 경향들은 서로 목적과 수단의 의존 관계에 놓인다. 장신구는 또한 어떤 의미에서 利他的인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나 존재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이 자부심을 위해 다름 아닌 남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장신구는 마치 사람들 자신이 발산하는 광채처럼 작용하면서 사람들의 인상을 돋보이도록 하거나 확장시킨다...사람들에게도 일종의 放射線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 주위에는 그 사람에서 연원하는 의미의 크고 작은 영역이 있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

 


5. 인간의 영혼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는 곳이 얼굴이다...인간 정신의 고유한 업적은 이 세계의 요소들이 지니는 다양성에 내적으로 일련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데 있다. 부분들이 서로 내적인 관계를 맺고 통일적 삶의 과정에 통합되어 있는 유기체는 정신의 바로 이전 단계에 속한다. 인간의 몸 가운데 이 같은 내적 통일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얼굴이다. 손은 몸의 다른 부분에 비해 가장 통일성이 크지만 그래도 얼굴만은 못하다. 이처럼 우리는 얼굴의 개별 특성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의존을, 그 배후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직관될 수 있는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얼굴의 구조는 말하자면 정신의 부재를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 즉 입을 딱 벌리거나 눈을 치켜뜨는 경우, 이러한 동작들은 미적 감각에 상당히 어긋나며 또한 의식의 상실이자 영적 불구의 표현이며,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이 순간적이나마 상실되었음을 보인다...그리고 눈만큼 절대적으로 자신의 위치에 머물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듯이 보이는 것은 없다.



6. 예술작품의 인상이 심오하고 유일무이할수록, 그 작품의 양식에 대한 질문은 그 인상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렘브란트의 종교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를 볼 때 우리는 양식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양식화된 대상을 대하면서 우리의 삶은 흔히 예술작품이 지향하는 개별성의 접점들을 벗어나 더 이상 혼자라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지점에 도달한다. 현대인이 그렇게 강력하게 양식을 추구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 지닌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또 그것을 은폐하는 데에 양식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자아가 더 이상 혼자서 자신에 대한 부담을 짊어질 수 없거나 혹은 적어도 자신을 더는 내보이고 싶어하지 않아서 일반적이고 좀더 전형적인 양식화된 옷을 두르는 경우와 같다. 이로써 개인의 주관적 인격과 그를 둘러싼 인간적 환경 및 객관적 환경 사이에 초개인적 형식과 법칙이 끼어들게 되는데, 그것은 아주 섬세한 부끄러움의 결과다.



7.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회적 통합을 보존하는 형식은 정신적 요소나 실제적 요소 또는 긍정적 요소나 부정적 요소처럼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유지된다. 그 가운데 신의는 감정적 요소다. 신의는 그 자체가 감정의 형태를 띠고 있거나, 감정의 차원에 투사되어 있다. 관계가 지속되면 이 지속적 상호작용 속에 특별한 감정이 형성된다. 아니면 처음에 관계를 성립시킨 심리적 상태들이 신의라고 하는 특유한 형식으로 변형된다. 이 형식은 심리학적 저수조이다. 즉 신의란 아주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서, 그리고 다양한 상호결합의 동기를 전체적이고 통일적으로 담아내는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