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731년/ 湛軒 홍대용 출생
2. 1737년/ 연암 박지원 출생
3. 1750년(영조26)/ 楚亭 朴齊家 출생
4. 1754년/ 연암 우울증과 불면증 앓음. 소설 9편을 써서 반향을 크게 얻음. 과거장에서 책 휴대금지령, 侍從의 입장 금지령
5. 1763년/ 성호 이익 별세
6. 1765년(영조41)/ 연암, 유언호 등과 금강산 일대 遊覽. 담헌 홍대용은 숙부인 억(檍)이 書狀官으로 청에 갈 때 軍官으로 수행하여, 연경(북경)에서 청의 학자인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면서 경의(經義), 역사, 풍속, 제도 등에 대해 토론했다. 담헌이 <燕記>를 짓다.
7. 1768년(영조44)/ 연암, 백탑 부근으로 이사. 근처에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이 있어 이들과 함께 <북학파>의 학문적 근거지가 되다. 楚亭 박제가, 소년시절부터 詩書畵에 뛰어나 문명을 떨치며 19세를 전후해서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들과 교류하다
8. 1770년(영주46)/ 연암, 司馬試의 초종장 모두 장원하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시험에서는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다
9. 1771년/ 연암, 과거를 포기하고 백동수 등과 함께 송도, 평양 등지를 거쳐 천마산, 묘향산 등지를 유람. 백동수와 함께 황해도 금천군 연암골을 답사한 후 은둔할 뜻을 가짐, 호를 燕巖이라고 쓰다
10. 1776년(정조원년)/ 박제가-유득공-이덕무-이서구 등이 <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게까지 떨치다
11. 1777년/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12. 1778년/ 사은사 체재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 박제가는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 귀국 후 박제가는 <北學議> 내외편을 저술. 내편에서는 생활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13. 1779년/ <奎章閣>에 檢書官의 직을 설치,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徐理修) 등의 서얼출신 학자들을 초대했다
14. 1780년(정조4)/ 연암, 청 건륭황제 70회 생일 축하 사절단에 포함되어 燕行. <熱河日記> 집필. 연암의 차남 종채, 태어나다
15. 1783년/ 홍대용 53세로 별세
16. 1786년(정조10)/ 추사 김정희 출생. 초의, 전라도 무안에서 출생
17. 1789년/ 조희룡 출생. 프랑스 대혁명. 미국 신정부 수립, 워싱턴 초대대통령 취임. 백동수는 장용영(壯勇營)의 哨官을 지내고, 검서관인 이덕무와 박제가와 함께 <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다
18. 1791년/ 6살이 된 阮堂이 입춘첩을 써 붙이고, 이것을 본 박제가가 학예로 세상을 이름을 떨칠 것을 예언하다
19. 1794년/ 박제가,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다
20. 1799년/ 연암, <課農小抄>를 지어서 바침
21. 1800년/ 완당, 박제가에게서 사사(師事). 정조 승하
22. 1801년(순조1년)/ 박제가, 사은사 윤행임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번째 연행길. 박제가 무고로 신유사옥에 연좌되어 종성으로 유배. 정약용 강진으로 유배.
23. 1802년/ <장용영> 폐지
24. 1805년/ 연암 재동 자택에서 69세로 별세. 박제가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