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시작한 산책이 길어져 문득, 해가 넘어갔다. 하늘과 나무와 바람뿐인 곳에서 터벅터벅 발소리만 울린다. 어둑시근한 길 너머에 이 세상(この世)이 있을지, 저 세상(あの世)이 있을지 알 수 없어도 발 아래 닿는 표면의 감각에 의지한 채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일순(一瞬) 판돈이 생명인 무사처럼 한걸음, 한걸음에 진지해진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이라고 하면서도 강자가 모두 위선적이지도 않고 약자가 모두 위악적인 것도 아닌, 단순하지 않은 현실에 대해 말한다. 하여, 요점은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내 곁을 스쳐지났던 위악의 얼굴들과 위선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지금,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산성 위에서 하나의 개체가 되어 자연 속을 걷고 있는 나의 얼굴을 그려본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려지고 삶과 죽음이 한치 발앞에 나뉘는 실존의 경계 아래, '죽음처럼 무서워할 변화의 계기'를 얻을 수 있기를, 나의 앎이 나를 구원할 수 있기를, '스스로 명백하다는 몰이해에서 벗어나 몸을 끄-을-고 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