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藏讀(37회)_ 후기(2-3 - 계속)

by 孰匪娘 posted Jun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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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藏讀(37회)_ 후기>


“내가 오랫동안 ‘응해서 말하기’를 대화의 준칙으로 내세웠지만, 대화 중의 말은 ‘하고싶은 대로’해선 안되고, ‘상대에 말에 준응(準應)’해서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능한 기분은 죽이고 논지를 살린다는 취지로 말을 이어가면서, 공동노동으로서의 대화라는 가치를 잊지 않아야 한다.”(선생님, 6월 장독 강연 )

 

1. 언제부터인가 나는 공부자리에서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분별하는 공부자리의 윤리는, 뱉은 말의 성격을 늘 감찰하게 했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뱉은 말은 언제나 청자에 가 닿기도 전에, 공중空中에서부터 그 말의 성격을 알려왔다. 회수할 수 없는 말의 속성상 낭패감을 맛보기 일수 였고,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것 마냥 피 흘리는(선생님)’ 시늉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얻은 묘수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챙기는 것이었다.


2-1.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의 중간 어디 즈음에 있는 말로, 내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존재의 조건을 개시하는 말이다

 타인들과 함께하는 대화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의 분별은 내게 발화한 이후에나 찾아오는 화인火印과도 같았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이 기분에 취한, 혹은 에고를 보완하는, 그도 아니면 고루한 ‘상투어와 관용구(아렌트)’로서의 하고 싶은 말인지, 해야할 말로서 논지를 좇아 옮아가며 대화의 장을 돕는 말인지를 아는 것은 언제나 사후事後적이다. 자신의 조음기관을 통해 발화된 말이 타성을 띄며 돌아온다. 자기의도와 자기의미를 벗겨내고 그 장소의 말에 쓰임(話用)에 따라 되돌아 온 ‘발화 된 말’은 화자를 제 말의 청자로 변용시키며 그 성격을 재구성한다. 이는 발화해 봄으로써 알게되고, 그에 응한 타자의 말을 들음으로써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이다“청자는 화자의 말을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라캉과 정신의학,82).


2-2. 돌아온 말은 빈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장소와 청자에 따른 무게를 가지고 돌아온다. 우리의 공부자리가 단순한 대화会話:かい의 자리가 아닌, 대화対話:たいわ할 수 있는 자리 일 수록, 화자로서의 자기()는 청자로서의 자기를 수반하며 돌아온 말의 중력을 체감한다. 말의 무게는 말한자(話者)의 책임으로, 말한자가 감당해야할 몫이다.(이 책임은 그야말로 자기의 책임으로 결코 타자가 부여한 책임이 아니다. 말해지기 전에 이를 안다면 참으로 지혜로울 것이다.)


2-3. 반면에 ‘할 수 있는 말’로의 관점이동은 사전事前적 성격이 짙다. 우선 준비를 한다는 데에서 사전적이고, 이미 내재한 말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사전적이다. ‘할 수 있는 말’이 사전성으로 일관될 경우, 장소 혹은 듣는 이의 사정과는 별개가 되어 인문학 대화의 현장성을 살리지 못하고 말을 하는 이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친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말을, 발화전 되새기는 것은, 이 정당성과도 관계하는데, 말의 무게가 쌓일수록 감당해야할 몫이 결코 녹녹치 않다는 점에서 옭아드는 존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어떤 날엔 비대해진자아로 인해,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날이 있는데, 내 존재의 한계이자 조건으로서의 할 수 있는 말을 구하다 보면 자신에게 솔직해지고(한계), 타인에게 자신의 어찌할 수 없음(조건)을 내보일수 있게 된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 사이에 자리한 주체Subjet(선생님,적은 생활,작은 철학,낮은 공부,196,늘봄)’라는 말이, 이럴 때 참 유용하다.). 선생님께 배운바“말이란 청자와 정신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며, 청자와 함께 청자를 위해서, 그리고 청자를 향해서 행해지는 행위이다. 가능한 청자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말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말하기는 실용성practicality이 우선이다 (선생님,6월 강연 중). 이를 관과한 자기 정당성에만 충실한 말하기는 청자를 상실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에 첨가되는 윤리의 생성에 대화의 현장과 타자(청자)의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사전에 준비/내재된 말로 대화자리의 논지를 파악하며 할 말을 챙기되, 현장에서의 청/화자의 말을 들으며, 첨부되는 새로운 말과 함께‘공동의 노동으로서의 대화’의 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는 타자가 편입된 자리에서의 ‘할 수 있는 말’이, 타자에 대한 윤리 없이는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