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
1972년 처음 출간된 <꽃들에게 희망을>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트리나폴리스의 아동문학입니다.
“왜 공부를 하세요? 이곳은 뭐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모여서 장소를 만들고 공부를 하시는 거에요?”
2018년 8월, 서울 해방촌 계숙에 초대되어 갔던 미숙한 저의 첫 질문이었습니다.
최근 몇 달전에 남편과의 대화중 공부를 왜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화를 시작으로
「꽃들에게 희망을」책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이 책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1. 무엇을 찾고 있나요?
아주 옛날 작은 호랑애벌레 한 마리가 오랫동안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던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게 분명해. 그저 먹고 자라기만 하는건 따분해” 하고 생각한
호랑애벌레는 그 이상의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호랑애벌레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무언가를 찾아 헤메던 호랑애벌레는 바삐 기어가고 있는 애벌레떼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늘로 치솟는 커다란 기둥, 곧 애벌레 더미로 된 기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있어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호랑애벌레는 알수 없었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찾으려는 것이 저곳에 있을지도 몰라”
<꽃들에게 희망을 中>
우리는 태어나 사회화되고, 그 사회에서 다시 독립하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문명속의 불만>에서
인간이 행복을 얻고 고통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면서 “운명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적인 정신 작용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 과정에서 리비도의 이동성을 이용한다. ” 프로이트 <문명속의 불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55쪽
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도 리비도의 이동성을 이용하면서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프로이트)처럼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저를 ‘구원해줄수 있는’ 어떤곳이 있을 거라는
상상으로 장숙의 문을 두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2. 지금 어디에 있나요?
호랑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밟아가면서, 그렇게 밟기 위해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되새기면서
결국 꼭대기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에 비참함을 느낍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저기좀봐.
기둥이 또 있어. 그리고 저기도... 사방이 온통 애벌레 기둥이야!” 이제 호랑 애벌레는 실망만이 아니라 분노마저 느낍니다.
호랑애벌레와는 헤어져 다른길을 선택한 노랑애벌레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느날 노랑애벌레는 늙은 애벌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애벌레는 털투성이 자루 속에 갇혀 있는 듯 했습니다.
노랑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한다는 늙은 애벌레의 말을 듣고 망설이다 물었습니다.
“나비가 되기로 결심하면..... 무엇을 해야되죠?”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일단 고치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밖에서는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꽃들에게 희망을 中>
<속속>이라는 장소가 저를 ‘구원해 줄수 있는 곳’이라는, 더나아가 ‘구원해주어야 하는 곳’ 이라는 상상과 함께
어쩌면 <속속>을 쉽게 소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소비의사회에 익숙해져버린 저의 패턴이
삶도 소비처럼 쉽게 구제할수 있다는 상상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눈만 감았다 떠도 말이 좋아지고, 앉아만 있어도 실력이 좋아질수 있다는 이상한 공식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불안해만 하는 증상으로, 투사와 전이로, 저항으로 돌고 돌면서
같은 장소를 맴돌며 무지의 시간으로써 흐르게 했는지모릅니다.
그렇게 때로는 호의로 때로는 호감으로 누군가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약자’의 장소에 스스로 갇혀 앉아 울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신뢰는 호의나 호감처럼 이기심에 응해 자연스레 몸에 얹히는 정념이 아니라 어렵사리 배워야 한다’ 집중과 영혼 912는 말은
결심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앉아 있는 이기적인 저를 비추어주는 것 같아 부끄럽게 되는 것같습니다.
스스로 잠궈버린 문은 그누구도 대신 열어줄수 없다는 것을 몸은 알지 못하는 듯 여전히 그 자리를 맴돌며
익숙한 장소에서 발을 떼지 않으려 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지점 또한 약속과 변명속에서, 틀과 꼴 속에서 허우적대는 제 자신을 볼때입니다.
‘꼴을 가진자가 틀을 만나는 순간 공부가 시작되고 .....' 라는 83회 속속 한문 강독시간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새 틀을 개입시키기 위해서는 익숙함의 균형을 깨는 각오도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쉽지않은 공부의 길’이라는 말을 자주 하고 자주 듣게됩니다.
어쩌면 새로운 생활양식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비용 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새로운 틀은 새로운 주체의 생성을 위한 필요·필수 조건 집중과 영혼, 902’이라는 선생님의 글과 함께
현재의 꼴과 가져올 틀을 그리고 기꺼이 치루는 데 필요한 태도 같은것들을 차근히 짚어 보게됩니다.
어떤날은 공부를 하면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아무것도 없는 것같아 막막한 날들도 함께 쌓여만 갑니다.
지혜 지(智)에 날일(日)이 있듯 '지혜'는 시간과 함께 만들어 지는 공부라는 말들도 떠오릅니다.
기다림도 여전히 배워야할 공부의 한 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앞으로도 제가 가져갈 질문인것같습니다.
당장 무언가를 하고, 당장 먹을수 있는 것들을 누리는 삶을 포기할만한 간절함이
어떤 상흔으로, 슬픔으로 저에게 남아 여전히 걷게 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흔들리고 조금은 쓰라린 그 버거움들과 아슬하게 걷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아 눈을 돌려버리고 싶은 순간, 회피하는 것이 편한 그 쓰라린 순간들을
애써 마주하는 시간이 모여 저의 고치속에 ‘신뢰’라는 작은희망이 자라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