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by 형선 posted Mar 13,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여타의 역할들처럼 여성의 ()역할도 암묵적으로 전염/전수되는 것 같다. 겪고 난 일에 대한 이해는 뒤늦게 온다. 나는 결혼과 출산, 육아를 통해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역할을 이해하고 선택한 건 아니었다. 두리번두리번 투덜거렸고 신경증을 감추지 못했다. 여성은 가정의 보호를 받지만 (이리가라이의 말대로) 가정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안온함도 혼돈도 나름의 역할이 있으니 다행인건가. 문정희 시인은 제도 중에 그나마 혼인이 가장 나은 제도라 했는데, 득이 있으면 실이 있기 마련이고 최근에야 두 가지가 고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정 내 여성이 위태로울 때가 많다고 항변하고 싶은 건 아직 화해하지 못한 일들 때문이리라.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스무 살부터 만나 온 A가 내가 사는 도시 가까이 이사를 왔다. 덕분에 오랜 친구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어느새 아이가 하나 둘 생겼고 안고 업고 떠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 날 밤, A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름이었고 비가 오는 날이었다. A는 가정폭력으로 남편을 신고했다고 했다. 경찰서로 데리러 와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A를 태워 오던 그 밤 괜찮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왜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초라해야만 했을까. 멈추지 않던 비 탓이다. 비 탓.

<남자의 손>을 피해 급히 뛰쳐나오는 바람에 A5살 된 딸아이는 아빠에게 남겨졌다. 법원의 권고가 있기까지 A3개월간 딸을 만날 수 없었다. 이후 1년 반의 긴 양육권 소송이 있었다. 법원은 전남편에게 폭력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고 양육권도 줬다. A는 끊임없이 심문 받았다. ‘네가 문제 있어서라는 말에 절규했고 원망과 억울함을 피하지 못했다.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딸아이가 질긴 삶의 동력이 되었다. 어렵사리 구직을 하고 공부를 했다. 그녀는 열악한 조건에서 누구보다 분투하고 있다.

법정이란 곳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조정위원, 변호사, 판사, A의 전 남편의 말을 들었다. 죄다 남자다. 법정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말이 오가는 장소로 생각했었나 보다. ‘왜 아이를 두고 밖으로 나갔냐, 또 그럴 것 아니냐’ ‘남편 쪽은 양육권만 얻으면 다 포기할 수 있다고 한다고 한다. 당신은 위자료를 받으려 하지 않냐’ ‘여자가 씀씀이가 헤프다. 공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방향을 가진 질문이라고 생각되었던 건, 우리의 어떤 상태만을 드러내는 것일까? 주 양육자였던 A와 아이의 관계는 소외되었고 폭력 상황에서 여성의 공포는 무시되었다. 어느새 경도된 나의 서술에 왜곡이 있겠다. A는 숨이 가파르고 몸을 떠는데 전 남편은 사람 좋게 반성을 하며 아이를 위해 말할 수밖에 없다는 듯, A의 양육태도와 살림살이를 따졌다. 이쪽 변호사의 충고대로 증명 자료를 낼 뿐 법정에서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거짓 자료는 계속 말해지고 제출되었다. 정신이 얼얼했다. ‘이 세상이 너무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뛰쳐나왔는데, 왜 그랬냐고 묻는다...... 너무 무섭다.’며 A는 울었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을 했다.

A의 영향도 있고 내가 체감한 것도 있고 또 딸이 셋이어서? 여성의 자리를 주의 깊게 보게 된다. 남성의 권력에 지배당한 오랜 이력, 깊숙이 내장된 공포와 사회적 약자로서의 처세. 주체성보다 의존성이 안전했을지 모르겠다. A는 가정과 남편을 벗어났지만 그 삶 역시 만만치 않다.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자신과 싸워야 하고, 위축되어 왜곡된 인지에 좌절한다. 생계도 큰 과제다. 기다려야 볼 수 있는 아이도. 가부장제에 귀속된 적 있는 여성의 이력이 득이 될 날도 올까. 어느 날 나는 어리석게도 정말 여성이, 내가, A가, 남자보다 못난 것은 아닐까라고 물었다.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어떤 일이든 해결의 열쇠가 저편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문제는 화해보다 응징을 원하는 어떤 경험. 서러움과 분함에 매몰되어 자신과 타자를 소외시키며 받은 대로 돌려주고 싶은 힘에 대한 선망이 약자의 경험한편에 도사린다. 하지만 누구의 말대로 약자의 경험은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강력한 매개다. 엄마가 되고서야 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고 감춰진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A의 사정은 나아질 것이다. 더불어 감정 이입된 내 상태도, 혼인 제도를 횡단 중인 나의 질문도 나아질 것이다.



그림1.png



  

* * *


요컨대 여성의 분한에 정직하고 이를 풀어내는 게 극히 중요하다. 물론 이 분한은 

개인들의 뼛성과 스트레스에 의해 포촉되기 전에 이미 역사와 무의식과 몸의 것이다

여성의 분한을 해소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성’(faix sex)'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한 성(socially weaker sex)’이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창의성에 물꼬를 대는 일이다

이는 필경 남성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한데, 대체로 창의와 창조는 적절한 상대와의 풍성하고 민활한 응변(應變)의 과정에 의해 

생성되고 증폭되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을 증폭시킬 것인가? 여자의 분한과 남자의 여혐을 응고시켜 그 얽힌 갈등을 증폭시킬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물꼬를 타고 흘러내릴 여성의 창의적 에너지와 이에 응변하는 남성의 창의성이 서로를 증폭시키도록 도울 것인가?”



(<집중과 영혼>, 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