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이었는데 <살다, 쓰다>에 ‘여성’이란 제목으로 A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글을 쓸 당시 법원은 양육권을 원했던 A에게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볼 수 있는 면접권과 위자료를, 전 남편에게는 가정폭력 벌금500만원과 양육권을 줬다. 하지만 A는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주 양육자 자격을 누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아이와의 분리 혹은 단절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법원은 양육자의 제1조건으로 경제력을 꼽는 듯했고 가정에서 막 이탈한 A의 사정은 열악했다. A는 당시로서는 승산 확률이 거의 없는 재심 청구를 고심했다. 그녀의 고심에 나도 망설였는데 일시 그의 절박함은 변호사를 포함한 주변인들의 ‘한 말씀’으로 훼절되기도 했다.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매달 양육비를 보내면서도 매달 아이를 볼 수 있을지 마음 졸였다. 아이를 보기로 약속한 날 아이의 아빠는 연락이 안 되거나 핑계를 댔고 심지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버려 딸아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불투명해졌다. A는 두어 달에 한 번 아이를 만나면 아이가 어디서 생활하는지 누가 주로 돌보는지, 아이의 표정과 말의 행간을 읽고 상상하고 사실화하는 식으로 아이와 근접해 있으려 애썼다. 집에 새엄마랑 언니랑 오빠가 있다는 얘기, 고모네 집에 아이의 책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결국 얼마 안 가 연락이 두절됐는데, 엄마를 만나고 오면 아이가 그쪽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게 그즈음 했다는 얘기다. A는 어디론가 내몰려갔다. 그리고 몇 개월간 그 누구하고도 연락을 끊었다. 사람 없고 말도 없는 곳에서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아는 것이란 그녀가 거듭 홀로 있었다는 것뿐이다.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몇 달의 절망을 찢고 초등특수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작년 10월인가 임용고시를 두 달 남겨두고 정말 오랜만에 서울역 어느 식당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곡절이 주제가 되어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는데, 어? 밥이 맛났다. 이 와중에 우리의 미각이 살아있다며 한바탕 웃었다. 웃음소리에 놀라 달아날 만한 것들은 훠이훠이 가시라고 더욱 크게 웃어 버렸다.
어느 정도는 무뎌지고 어느 정도는 단련되겠지만 그것이 영영 불가능한 고통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A의 경우 고통의 강도와 상관하여, 상관없이, 법원의 판결 즉 아이와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지점이 중요해 보인다. 법원이고 뭐고 경제적 능력이고 뭐고 말이다. 무의식적인 확고한 저항과 타협 없음이 오히려 그녀의 에너지원이 된 듯하다. 아이를 향해 있지만 체제에 빼앗길 수 없는 자신의 삶, 자신의 생을 지키려는 맹목성 같은. 어떤 경계에서는 악착같이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데 그 자체의 성가심이 다른 물매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다시 만난 A는 자신을 챙기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절실한 소원이었지만 아이를 위한다는 당위보다 아이 없이도 밥을 잘 먹는 자신을 받아들인 듯했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양육권을 얻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이제 자기 밖으로 나가는 문(門)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A의 곁에서 어떤 대상화를 무릅쓰고, 내게도 생겨난 질문이 있다. 타자의 말과 어긋난 몸을 추스르며 그녀가 보게 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소외시킬 뿐인 타인의 말을 그녀는 어떻게 처리 혹은 극복했을까, 어느 정도의 타협과 체념의 수혜도 있을까, 원망과 절망은 그녀에게서 각기 어떤 방향성을 얻은 걸까, 하는 질문.
짐작일 뿐이지만 자신의 고통을 타인과 나눌 수 없다는 것, 타인에게 기대는 식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깨침이 있었던 것 같다. 약자로 자신을 배치할 때는 일부 안전하기도 했던 ‘의존성’과도 대면한 듯하다. 차갑고 허무하게 흐르는 인생의 한 면을 삶의 일부로 수용한 듯도. 여전히 일곱 살 난 딸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법원에 면접교섭권을 청구해 놓았고 임용고시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했던 겨울이 지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은 흘러 어느새 오월이고 창밖의 녹음은 하루가 다르게 방농하다. ‘상처 보다 힘이 센 시간’이라 하던데 다행히 A의 막막하던 시간도 흘렀다. “다혜야, 언니 공무원이야. 어깨 펴고 살아. 언니 공무원이다!” 얼마 전 통화하며 A가 하던 말. 그 말의 화창(和暢)함이 아직도 감돈다. 언제든 침입할 상처가 저만치에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잠시 모닥불에 손을 녹일 수 있는 날도 왔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A는 이번 해 초등특수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아이의 아빠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사정에 떠밀려, 올 3월 양육권을 양도했다.
성급하고 경도된 외침인들 어떠랴, A의 승(勝)이다. 그녀의 맹목성이 이겼다. 권력의 언어도 자신을 소외시키는 타자의 언어도 아닌, 차마 아이도 아닌, 자신을 붙잡은 그녀의 전회에 경의를 표한다.
타협도 번역도 불가하게 생의 에너지가 절절히 흐르고 있는 한 여성을 안다.
*어떤 물화를 피할 수 없는 서술을 허용해준 A의 동의하에 이 글을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