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藏讀(35회)_ 후기>
*
“사람의 힘은 삶의 양식에서 나온다.” 이번 장독 강연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듣기에 쉬웠고 읽기에도 쉬운 말이지만, 이를 일상에서 실감하거나 이 말을 벼리 삼아 생활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양식이라는 말이 ‘일정한 모양이나 형식(네이버 사전)’을 뜻하기도 하지만 ‘오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정하여진 방식(네이버 사전)’이라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듯, 삶의 양식은 단순간에 만들어지거나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
선생님께서는, 삶의 면면에서 “제 실존과 정신의 고유한 가치를 자각하고 이를 실천하며 책임지는 일은, 어떻게 가능해 지는가”를 물으셨다. 그리고 “양심의 사건”을 이야기 해주셨다. “양심의 사건”은 “삶의 양식이 만든 일관성의 무게”에 의해 생성된 ‘사건’이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니까, 양심은 존재의 밑바닥에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활양식을 지며리 해 나아갔을 때 생성되는 “정신의 일관성(geistliche Konsistenz/니체)”과도 연결지어진다는 말씀이셨다. 어떤 존재는 “시민적 명예의 자리를 지키려고 시인의 영혼을 오염시”키지만, 어떤 존재는 세속적 혹은 도덕적 가치의 추구로부터 물러나, 자기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알고 그 영혼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는 말로도 이해 되었다. ‘어떤 존재’와 ‘어떤 존재’의 사이에는 ‘양심의 사건’이 가로 놓여 있었다. ‘사람의 힘’은 삶의 양식에서 건조(建造)된 ‘정신의 일관성’이라는 것을,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
‘정신의 일관성’(혹은 '양심의 사건')의 구체화는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되는가?’라는 질문이 온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선생님께서는 “표현하는 권위”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어떤 사람은 권력(소유)을 추구하지 말고 권위(표현)를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셨다. ‘소유하는 권력’과 ‘표현하는 권위’의 대별이 귓가에서 쟁쟁 울렸다. “리상즉시불(離常則是佛)” 상을 떠난 즉 부처와 같다는 말을 인용하시기도 하셨는데, 표상이 걷힌 존재는 고정된 무엇일 수 없고 표현으로서만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생활 양식의 면면에서 드러내어지는 표현되는 존재의 구체성을 알 수 있었다. 생활 양식이 단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 생활 중 드러나는 ‘존재 표현’은 생활양식이라고 명명지어진 수행적 일관성에 따라 그 질감을 달리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였던 분들에 입각해 그분들의 존재성을 설명해 주시는 맥락이었지만, ‘존재는 표현이다’라는 말에,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표현하는 존재였던가’ 새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은 실로, 일촉즉발하는 ‘표현’의 문제였다.(이 때 선생님께서는 ‘표현’을 말씀하시며, 헤겔의 ‘절대정신’을 잠시 이야기해주시기도 했다.)
*
“역어물역물(役於物役物)!” 존재와 외계사이에서 사물/사건에 부림을 당하는 객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물/사건을 부릴 수 있는 주체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장숙>의 (자유론이 가능하다면)자유론과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정해진 대로 하는 바는 다만 공부의 맥락으로서, 내가 정한대로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것인가, 내/외부로부터 틈/침입해 오는 쉼 없는 일련의 사건들에 휘둘리는 객체가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생활과 일상이라는 삶의 영역을 넘어, 죽음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사유와 태도를 함양시키는데에 까지 나아갔다. 이른바 “죽음의 주체”라는 개념의 탄생이었다. 이 때의 죽음은 “한 생애 전체를 내적으로 통합하려는 조망에서 생긴 ‘완결’”이 된다. 외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도, 자연사로서 수명을 끝내는 것도 아닌, 죽음조차, 주체의 한 행위로서 마감할 수 있는 “정신의 일관성”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공부하는 학인에게 으뜸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단연 자득(自得)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평소 학인요자득(學人要自得)을 강조하시며, 자득을 소홀히 하지 않고 늘 챙겨야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학인에겐 자득이 필요하다. 자득으로 길을 내고, 공부의 동력을 얻으며, 자기 공부의 지평/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 캄캄한 밤하늘의 별처럼 다음으로 나아갈 방향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이번 강연에서 선생님께서는, 자득이란, “마음의 경계가 바뀌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혀 주셨다.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우주의 경계처럼, 마음의 경계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으며 그 경계를 바꾸어 나간다. “죽음의 주체”는 지금의 내가 알 수 없는 마음의 경계이다. ‘죽음의 주체’까지 나아간 정신이 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으로의 비약(飛躍)과도 같다. ‘죽음의 주체’ 표현은 의도가 아닌 ‘엄중한 실력’인 것이다.
****
“사회학이나 과학에 잡히는 자살이 명사적이라면, 인문학에 잡히는 자살은 동사 혹은 더 나아가 부사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향하여, 혹은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향하여 극렬히 상처받는 인간의 마음 또한 결코 명사적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 해주시는 것만 같았다. 인문학이 무엇인지가,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가 명료히 재 범주화되었다. 우리는 수치(數値)나 현상이 아닌, 사람이었다. /세 정치인(노무현, 노회찬, 박원순)의 죽음에 관하여, 인문학적인 시선과 섬세함으로 재서술된 선생님의 말씀이 참으로 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