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은 그 주변을 살피고 따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자기성찰이라는 변명 속에 밝아지는 등불은 바로 그 등불의 존재 탓에 자기 자신의 일부를 숨기게 되는데, 이 존재론적 은폐(die ontologische Verborgevheit)는 곧 타자의 시선과 개입을 부른다.”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273쪽)
허영을 피할 수 없는 글쓰기라고 하셨다. 그래서 허영과 싸우는 글쓰기라고 하였는데 나는 얼마나 내 허영을 인정하고 있을까. 스스로 볼 수 없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글(삶)에 대한 비평은 절실한데 다행히 네 번의 연재 글을 쓰고 한 숙인의 비평을 들을 수 있었다. 간결하지만 묵직했던 비평에 의지하여 지난 연재 글 <여성>에 되돌아갈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보게 된 것을 기록하고자 한다.
비평 ① <글을 쓴 뒤에 자신을 어디에 배치했는지를 보아야(보여야) 한다>
"‘대학은 병들어 있다와 같이 대화 혹은 담화에서 발화되는 지시적 진술은 발화자(진술하는 사람), 수화자(진술을 수신하는 사람) 및 지시 대상(진술이 다루는 것)을 특수한 방식으로 위치 시킨다. 발화자는 이 진술에 의해 ’식자‘(그는 대학에 정통하다)의 위치에 설정되고, 수화자는 동의 또는 반대를 표시해야 하는 위치에 처하며, 지시 대상 또한 서술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것에 관련된 진술 속에서 정확히 확인되고 표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서광사, 1992, 30쪽.)
리오타르는 언어활동을 지시적 진술, 수행적 진술, 규정에 해당하는 진술로 구분한다. 위의 인용문은 ‘지시적 진술’에 관한 설명이다. 발화 행위는 지시 대상과 수화자를 즉시 어떤 자리로 위치시킨다. 이 일이 은폐된 자리 혹은 무지에서 이뤄질 때,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은 발화자에게 회수되지 못한 채 희생양을 만드는 것 같다.
애초 어떤 발로에서 글을 시작하였는지(아무도 없는 곳에서 당신이 한 일)를 묻는다. 글을 길어 올릴 가난하고 깊고 웅숭한 장소가 없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비평 ② <글에서 ‘물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피해자가 받은 방식을 답습하는 문제. ‘아이’는?>
‘풍경’이라는 원근법적인 인식 틀을 얻은 것은 정신의 진보이지만 이 진보는 ‘기원을 은폐’하는 문제를 수반했다고 한다. 부각되고 강조된 인물과 서술이 짙을수록 멀어지고 망각된 존재가 있다. 결코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주체가 되는 길은 없다. 지난 글에서 어른들의 양육권 분쟁의 목적이 된 ‘아이’는, 고유의 인격성에 부합한 방식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를 소외시킨 형식은 비합리적이라고 지목하였던 법원과 다르지 않다.
"내가 “물화”개념의 새로운 규정을 위한 열쇠로 삼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망각의 계기, 기억상실의 계기이다. 우리가 인식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인정하는 자세 취하기의 덕택이라는 감을 상실하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한낱 감각 없는 객체로 지각하는 경향을 발전시킨다."(악셀 호네트, 『물화』, 강병호 옮김, 나남, 2015, 90쪽.)
비평 ③ <제목이 왜 ‘여성’인가?>
‘자신’이라는 인식 틀로써만 사건을 인식하면 사건에 다가서지 못한채 오히려 글쓴이의 상태(상처,의도,기대)만을 알리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심리나 경험 외에 다른 매개(개념)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인식의 노동 없이는 자의적이고 자서전적인 마당을 나갈 수가 없다. 한편 자의적인 마당에서 사회적 약자로 위치된 여성을 표현할 때 취하는 구도와 서사의 형식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르게 말하'는 것이 실력인가 보다. 그리고 1년 전 글의 제목이 ‘여성’이고 연속 상에 있다 하여 무심코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것은 아무런 실력 없음이다.
그럼에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어떻게’ 쓰인 글의 힘을 믿는다. 삶과 더 근접한 언어, 과거와 미래, 삶과 앎을 함께 보듬는 설명, 사유로 새 길을 내는 문장, 일관되고 충실한 생활로 쓰여진 글. 그런 글을 읽으면 변명 혹은 허영의 말들이 부끄러웠고 적응된 생활이 찔렸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