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윤리적 합리성을 지향할 거라는 순진한 저의 생각에 충격을 안겨준 책이었습니다(대체 정치를 한 번도 신뢰한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정치가 윤리적 합리성을 향해 나아갈 거라고 무심결에라도 믿었을까요?). 일독 후 고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랐고, 그가 정치가로서 왜 험난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신념윤리에 기반해 소신껏(열정적으로) 정치를 하려 했던 노대통령은, 베버에 의하면 ‘세계의 윤리적 비합리성을 견디고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정치가(165)’의 일과 버성기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이번 독서에서는 1. 직업 정치가의 자질은 무엇인가?, 2. 정치의 윤리적 고향은 어디인가? 라는 두 질문을 통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1. 직업 정치가의 자질은 무엇인가?
베버는 직업 정치가의 자질로서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열정이란 하나의 대의 및 이 대의를 명령하는 주체인 신, 또는 데몬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의미하며, 그런 이상 이 열정은 객관적 태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하나의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열정이 우리를 정치가로 만들 수 있으려면, 그것은 헌신과 동시에 바로 이 대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열정이라야 하며, 더 나아가 이런 책임의식이 우리의 행동을 주도하도록 만드는 열정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균형감각이며, 이것은 정치가의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입니다. 균형감각이란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거리감의 상실>은 그것 자체로서 모든 정치가의 가장 큰 죄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거리감의 상실>은, 만약 이것이 우리 후배 지식인들에게 육성될 경우, 이들을 필연코 정치적 무능의 길로 오도할 그런 태도 중의 하나입니다...열정적 정치가의 특징인 강한 정신적 자기 통제력은 거리감에 익숙해짐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자기통제력이 그를 단순히 <비창조적 흥분상태>에만 빠져 있는 정치적 아마추어들로부터 구별하는 자질입니다.(132-134)
직업 정치가의 첫 번째 자질인 열정은 정치가의 신념윤리에, 두 번째 자질인 책임감은 책임윤리에 해당하는 것이며, 세 번째 자질인 균형감각은 흥분상태에 있을지 모르는 열정과 거리감을 두는 자기 통제력을 의미하기도 하며, 정치가의 열정과 책임감있는 정치실행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위 인용문을 근거로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하여 정치가의 자질을 논하는 것은 외람되기에 더 이상의 상술은 하지 않지만, 베버의 위 글은 그의 정치 행보를 분석하는데 좋은 참조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 정치의 윤리적 고향은 어디인가?_윤리와 정치 간의 진정한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139)
책의 서두에서 베버는 국가를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폭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29)’라고 의미 규정하였고, ‘정치는 (윤리와는) 전혀 다른 과업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과업들은 폭력의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것(165)’이라고 밝힘으로써 국가는 정치를 통해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폭력 사용의 정당성을 허가받은 정치가들과는 달리 폭력에 근거한 ‘세계의 윤리적 비합리성’(154)을 견디지 못하기에 신념윤리가로 남고자 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이는 정치의 기본 전제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베버는 말합니다.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책임이 있다(147)’는 말로 정치에서의 폭력이 정당화되며, (극단적) 평화주의적 기독교 종파의 하나인 퀘이커 교도들이 미국 독립전쟁 발발 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평가됩니다.
결국 질문 1과 질문 2는 다른 내용이 아니라 정치가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차원에서 하나의 문제로 합쳐집니다. 이 문제에 대한 베버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성숙한 인간(정치가)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정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요.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이렇게 볼 때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적대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함께 비로소 참다운 인간, <정치적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170)
3. 다른 공동체는 가능할까?
폭력의 합법성을 전제로 운용되는 정치가 아닌, 일상에서의 윤리적 합리성이 비폭력의 정치를 통해 실천되는 그런, 아름다운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버가 부정적인 어조로 언급한 퀘이커 교도들이 만든 펜들힐(미국 필라델피아 인근 소재)이라는 평화공동체와 인도의 생태공동체인 오로빌이 보여주는 윤리적 공동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다만 그 장소가 복잡다단한 정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소규모 공동체이기에 가능한 것일까요?
정치가의 자질로서 베버가 언급한 열정과 책임이, 열정 만으로는 안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있다는 것이 곧 책임감이 있는 것임을 의미하는, 즉 신념윤리가 책임윤리가 되는, 그런 정치의 장이 펼쳐지는 다른 공동체는 가능한 것일까요?
도시의 새벽, 오로빌 - 아웃도어뉴스 (outdoornews.co.k
펜들힐 소개 기사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