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개하지 않았을까?
이른 아침, 전화가 왔다. 그가 알게 된 누군가가 산후 우울증이 심해져 상담가를 찾는다고 한다. 근처에 알고 있는 ‘심리상담가’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얘기다. 두엇 사람이 떠올랐는데, 망설이다가 소개하지 않고서 전화를 끊었다. 왜 소개하지 않았을까?
어떤 평가가 따라왔던 게 사실이다. 여러 해 전에 몇 심리상담가를 접하며 전문적인 상담가로 준비되는 과정이 지난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나 내적인 문제가 시험대에 오른다. 자기 치유의 경험은 임상에서 중요한 자원이고, 상처의 깊이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투사나 전이를 다루는 기술을 익혀야 비로소 전문가 다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포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몇 기관이 공신력을 가지고 수련 과정을 선도한다. 그런데 주요 기관들은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고 시간은 시간대로 비용은 비용대로 큰 실정이다. 부득이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은 여건에 의해 제2의, 제3의 교육기관에 의탁하여 필요한 역량을 보충할 텐데, 그런 기관들의 수련 과정이 못 미더웠던 게다. 별다른 탐색 없이 주류 기관에서 수련을 받고 있던 이들의 위치성에 이입되었고, 수도권이나 주류 기관을 ‘중심’에 두고 회전하였던 듯하다. ‘중심’을 ‘믿고 소개할 수 있음’이라고 등치 시키며 ‘주변’을 소외시키는 도식이다. 다양한 발생 조건과 그에 따른 차이와 가능성, 삶의 여러 결을 외면하면서 말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나는 은연중에 대다수의 상담가를 불신(不信) 하고 있었다. 전문가적 엄정함을 갖추는 이들은 소수일 거라고, 자신을 벼리는 노동을 하는 이들은 드물 거라고, 대다수는 생활의 압박과 시속의 흐름에 질 거라는 추측을 사실화했다. 그리고 불신했다. ‘불신’은 ‘과신’ 혹은 ‘맹신’으로도 표출될 수 있는 믿음(信)의 형식 중 하나다. 정신 분석적 상황에서, ‘대상’에 대한 좌절의 경험이나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맞닿아 급진한다. 어떤 결여를 불신이나 맹신이나 과신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성급하게 불신으로 비약하였던 데에는 그런 요인들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한편 뇌의 상황에서, 욕망은 어떤 결핍 상황에 자극을 받는데 우리의 뇌에서 결핍 자극을 전담하는 기관은 ‘파충류의 뇌’라고 불리는 편도체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생존에 적합하도록 신체를 세팅하고 즉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대신에, 너른 시간 지평을 챙길 수 없다. 그러니까 결핍과 욕망에 추동되는 만큼 대상에 대하여 성급하고 시야는 좁아진다. 현실의 다양성을 헤아리거나 ‘과정’이라는 시간 지평을 수용할 여유가 없다.
불신도 과신도 맹신도 연극적으로 배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형식은 빈 곳을 메우는 방식으로, 빈 곳을 견디며 몸을 끄-을-고 대상에 접근하는 공부의 자세는 아니다. 차분히 빈 곳을 견디며 타자를 향하여 걷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몇 주 전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뉴스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차에 치일 뻔한 30대, 운전자 신상 공개해 200만원 벌금형”이라는 헤드라인이었다. 1차 피해자가 2차 가해자가 되고 1차 가해자가 2차 피해자가 되는 어떤 악순환이 단 하나의 현실처럼 전파되는데, 피차 보상받을 길이 없으니 연루되지 않도록 살라는 메시지가 번져나가는 것만 같아 우려스러웠다. 억울함이나 분한의 연쇄가 따갑게 의식되면서, 어쩌면 내가 일조하고 있는 억울함이나 분한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깥에 서서 남의 땅을 넘겨짚었고 그 땅을 위해 노동하고 있는 이들의 수고와 애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엿보며 수집된 정보와 소문으로 불신했고 결락시켰다. 누군가 내 땅을 그렇게 대한다면 나는 어떨까. 소개받지 못한 채 땅을 밟힌 이들이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듯했다. 인간에게는 ‘허소’로 표상되는, 침입할 수 없는 고유한 땅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남의 땅, 남의 물건, 남의 노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신뢰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어떻게 응했어야 할까. 소개하거나 소개하지 않거나, 라는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벗어나 소개하는 이가 보증할 수 있는 것과 보증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상담가를 찾는 이의 판단력을 존중하며 객관적인 정보를 최대한 줄 수 있지 않을까. 또, 남의 땅에 대한 불신(不信)을 제어하고 그곳에서 노동하는 삶의 고단함에 먼저 경의를 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시간성’의 동료로서, 누군가의 ‘가능성’을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남의 땅을 지나가거든
풍경보다 나우 깊이 걷게나
한 뼘 자리 소문을 탐하느라
부디
발돋움은 하지 마시게
먼 과거의 훈장이 되어 반짝이는 밤하늘을 살피듯
낯선 이웃의 표정 아래
두레박 떨어지는
아득한 허공을 느끼게나
남의 집에 발을 들이거든
그 낡은 탁자 위에
비수처럼 어린
묵은 슬픔을 기억하게나
엇갈려 부서졌던
그리움의 역사를 찾아보게나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사연의 깊이를
가을물 같은 잔잔함으로
어루만져 보게나
『옆방의 부처』, 글항아리, 2021년, 139쪽.
詩, ‘남의 땅을 지나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