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의 사진>
나는 한 때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소혹성 B 612의 그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있고 싶어했다. 그 의자는 내가 보아왔던 의자와는 달라 보였다. 어린왕자의 몸에 딱 맞는 그 의자는 화려해 보이지도 않았고 기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의자가 비어있을 때, 나는 의자가 어떤 기다림을 품고 있는 듯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의자도 누군가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의자를 바라보는 나의 개입이 있을 뿐이다.
저 의자는 어린왕자가 소혹성 B 612에서 홀로 앉아있던 하나의 의자가 아니다. 두 개의 의자,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의자, 조금은 이상한 의자다. (개입 아닌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저 의자는 세속의 낭만을 힘겹게 통과해내고 있는 그 서늘한 동무와의 자리다. 지금 내가 쓸쓸한 것은 기다림의 낭만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동무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이동할 수 있는 부사적 의미의 동무관계에서 빚어진 신뢰가 “마음의 작란 (作亂)을 넘어서”1)는 것임을, “나의 현재와 너의 미래 사이에 놓인 원초적 심연을 근기있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실천 방식”2)임을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린왕자의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환상의 진실성은 사실을 삶 속에 끌어 넣으려는 노력 때문에 얻어진다. 환상이 사실만으로 구축되어 있다면 그것은 상인의 더럽고 추한(!) 현실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리라”3) 그렇다면 우리의 환상, 우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길들인 것에 대한 사랑에는 책임이 있어야 하고 자유는 그 책임(생활)을 다 한 후에나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력이고 애씀이다. "환상을 환상답게 유지시키려는 노력이 필요"4)한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소혹성에 있던 의자를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영원한 타자를 그리워하는 것만으로 기다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언제나 '너'에게서만 찾았던 이유들은 보기 좋게 부서지지 않았던가.
환상만이 소망이 아니며 사실만이 전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국 그 사잇길을 걷고 있는 것이니 다만 그 길에서 엿보는 기다림은 낭만도 고백도 아닐 것! 내가 나를 길들이는 낮은 걸음으로, 불현 듯 찾아오는 절망을 “알면서 모른 체” 할 것!
“사그라지고 주저앉는 좌절과 상처가 낳은 더께위로, 위태롭지만 이드거니, 호감과 호의, 생각과 연정이 새롭게 갱신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관계를 한층 깊고 긴 호흡속에서 나누고 즐길 수 있을 것”5)이라는 부사적 관계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은 서로를 길들이는 힘이 아니라 다른 길을 여는 '시작'의 힘이다. 변화하고 이동할 수 있는 힘이다.
어린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는 시간 속에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6)는 것처럼 사적정서를 넘어선 동무들의 신뢰도 같은 풍경 아래 비밀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진 속, 두 개의 의자는 세속의 눈으로는 이해할 길 없는 조금은 이상한 의자인 것이다.
1), 2) 선생님 책 『동무론』, (한겨레출판) 284쪽
3), 4)생텍쥐페리 『어린왕자』,김현 옮김 (문장, 1978) 작품해설, 128쪽
5) 선생님 책 『동무론』, (한겨레출판) 284쪽
6) 생떽쥐페리 『어린왕자』,김현 옮김 (문장, 1978) 작품해설,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