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통신(2)
ANT(Actor Network Theory, 행위자네트워크이론)와 아이들(1)
184회 속속_20250607
1.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은 이미 1980년대 중후반에 출현했고, 1990년대 초중반에 부상(浮上)했지만, 우리나라에는 홍성욱 씨를 필두로 여러 학자들이 번역·소개한 2010년 즈음 이후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2025년 현재,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은 대략 40-45세 정도의 나이를 먹은 셈이니, 이론의 중년을 간취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어린 이론은 열정 속에서 오해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청년의 이론은 전방위적 적용을 실험하지만, 중년의 이론은 자신을 찬양하고-삼키고-소화하고-포함하며-그럼으로써 배제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오늘 나는 ANT와 더불어 바로 그 ‘아이들’ 중 몇 명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제인 베넷(Jane Bennet)의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2010)과 제이슨 무어(Jason Moore)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Capitalism in the Web of Life: Ecology and the Accumulation of Capital, 2015)를 소개하고, 다음으로(유재통신(3)에서) 애나 로웬하웁트 칭(Anna Lowenhaupt Tsing)의 『세계 끝의 버섯』(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2015)과 캐런 바라드(Karen Barad)의 「작은 문제/물질이 아니다: 버섯구름, 무의 생태학, 그리고 시공간물질화의 이상한 위상학」(No Small Matter: Mushroom Clouds, Ecologies of Nothingness, and Strange Topologies of Spacetimemattering, 2017)을 ‘아주 간단히’ 소개할 것이다. (만약 숙인들이 흥미를 표명한다면, 이 기획은 3부작, 혹은 4부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포스트휴머니즘)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객체지향 존재론을 살펴보고,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인류학적 글쓰기와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의 새로운 문학의 장르에 대해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이란 우선 지식의 ‘단위’에 대한 변혁이다. 역사적인 맥락을 살피면,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가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과학기술의 사회학)를 형이상학적으로 확장시키면서 만들어진 이론이기 때문에 사회학적인 과학기술 비판의 확대에 그 목적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라투르에 따르면, “ANT는 사회이론에 사회적 네트워크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사용해서 사회이론을 재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인 동시에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기도 하다”(99). 행위자네트워크이론의 단위는 물론 ‘행위자’이지만, 인간만을 행위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행위자’라고 재명명되고 ‘비인간-행위자’도 엄연하다.
‘행위자’가 곧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란 그저 ‘인간-행위자’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말을 쓰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도 행위자의 일부일 뿐이라면 이때 행위는 ‘인간이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주체의 능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재고되고, 기존 사회학의 강고한 이분법적 사고틀을 조형해왔던 ‘개인과 사회’, ‘자연과 사회’의 양항(兩項)이 재고된다. ANT이론에서 행위란 무엇인가? 그건 ‘네트워크화’일 뿐이다. 행위는 그때그때 파악되거나 형성되거나 (혹은 ANT식으로 말하자면) 동맹을 맺거나 연합하는 ‘네트워크’에의 조율일 뿐이다. 따라서 네트워크에 따라 행위자는 다르고, 네트워크화되어야만 행위는 보인다. 행위란 네트워크 속에서 접속되는 행위소들의 동맹속에서만 파악가능한 움직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네트워크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소들의 행위에 의해서 동맹을 맺는 시간 속에서만 접속되는 배치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아닌 것은 없지만 그 말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말은 아니다. ANT는 세계를 보는 ‘다른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ANT는 본질을 기술하기 위한 메타포(metaphor)를 바꾼 것이다. 우리는 어떤 면들 대신에 필라멘트와 같은 실조각들을 얻은 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위상의 변화이다. 2차원이나 3차원의 구 대신, 마디들은 그것들이 가진 연결의 수만큼 많은 차원을 갖는다는 관점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99). 필라멘트, 실조각, 마디와 같은 네트워크 무한개가 있다. 몇 개의 네트워크들이 모여 형성한 한정된 시공간을 가리켜 우리는 세계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네트워크들의 배경 같은 것은 없다. 네트워크 사이를 ‘채우는 에테르’ 같은 것은 없다고 라투르는 표현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단단한 범주인 ‘체계’는 이 무한한 다수의 네트워크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법칙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예외 속의 예외일 뿐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나치게 근시안적으로 보아왔던 셈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존 로(John Law)에 따르면, “ANT는 권력이 관계적이고 분배적인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이지, 완성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 ANT는 원인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권력에 대한 이론이다”(49-50). 우리는 여기에서 ANT의 탈주체적인 혁명성, 혹은 혁명을 치르는 주체가 더 이상 없는데도 가능해지는 혁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ANT의 방식은 체계나 권력과 같은 것은 행위자들에게 어떤 방식의 네트워크에의 참여를 조장하는 내러티브 경로에 불과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심지어 “시공간적 영속성도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 내러티브 프로그램과 내러티브 경로를 통해 내려진 결정의 결과”(121)라고 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3. 이런 관점에서 네트워크는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matter of concern)”임이 드러난다(271). 네트워크는 매번 창조되는 끈의 세계 같은 것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자를 알아볼 수 있는가, 그 행위자들 사이의 어떤 배치(assemblage)를 알아챌 수 있는가에 따라 개창되거나 밀폐된다. 홍성욱은 그렇기 때문에 “네트워크를 잘 기술(description)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이론”이라고 말한다. “연구자가 이미 소멸되었거나 블랙박스화된 네트워크에서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를 판별해내고 이들이 보여준 합종연횡의 궤적을 기술해낸다면, 이는 원래의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것이 된다”(28). 여기서 다시 한 번,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론가, 혹은 연구자가 이 구조를 ‘발견’해내거나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관심을 가진 연구자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네트워크를 ‘번역(translation)’하는 것이다. 로는 “번역은 변환(transformation)과 등가(equivalence)의 가능성, 즉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사[로] 이것이 ANT의 핵심”(49)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변환이자 등가인 것을 한 몸에 지닌 것, 이것은 원본 없는 번역이다. 등가가 되어버린, 그러나 하나의 변환인 기술, 그것이 바로 번역인 것이다.
4. ANT의 ‘꽃’은 번역이라고들 하는데, 그러면 이제부터 이 번역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나는 여기서 ANT에서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미셸 칼롱((Michel Callon)의 작업인, 「번역의 사회학의 몇 가지 요소들: 가리비와 생브리외 만의 어부들 길들이기」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글은, ANT번역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간명함에 있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칼롱은 생브리외만에서 가리비가 점점 멸종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행위자네트워크’로 번역한다.
번역의 첫 번째 발걸음은 ‘연구자의 문제제기’다. 문제제기란 “스스로를 연결망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도록 하는 이중의 움직임”(69)으로 ‘행위자들을 상호정의하는 것’과 ‘의무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을 정의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제기에 의해 상호적으로 정의된 행위자는 생브리외의 어부, 과학자동료, 생브리외의 가리비, 스스로를 드러 낸 세 명의 연구원이다(‘가리비’가 행위자라는 데 주목하라). 의무통과점(OPP)은 이 네트워크에서의 행위자들의 동맹이 가능하게 하는 질문의 통로를 체계화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OPP는 1) 가리비의 생존, 2) 과학자의 지식 향상, 3) 어부들의 장기적 이익 보존이라고 정리된다. 연구자들은 가리비, 과학자, 어부의 행위를 ‘유혹할 수 있는’ ‘관심끌기(interessment)의 장치’를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도록 하는 ‘등록하기(enrollment)’의 장치를 통해 행위자들을 가리비의 생존이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동맹군”으로 만든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연구자들이 동맹군 동원하기(mobilization)를 수행했다면, 상호행위자들 사이에서는 투표(토론)가 벌어지고 이는 연구자들이 이들의 ‘대변인’으로 임명되는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일본의 큰 가리비 회생에 성공적인 기술장치가 되었던 부착기구가 실제로 가리비의 관심을 끌고, 가리비로 하여금 부착하는 행위를 수행하도록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그리고 가리비가 부착한다면, 가리비는 찬성표를 던진 셈이다. 그와 우리는 ‘동맹을 맺은’ 것이다.)
가리비의 멸종에 얽힌 행위자들의 의무통과점이 이들을 동맹으로 네트워크화한다. 세계가 행위자, 의무통과점, 관심끌기, 등록하기, 동원하기(그리고 거절 혹은 찬성하기)를 거쳐서 구체화된다, 아니, 출현한다. 우리는 가리비와 어부와 과학자들이 협력하고 협상하는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것이 번역이다. “번역하는 것은 치환하는 것이다. 세 명의 지치지 않는 연구원은 그들의 동맹을 치환시켜 그들의 연구실을 지나쳐 가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번역하는 것은 또한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왜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합하는지를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93).
5.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생기적 유물론)
제인 베넷은 ‘행위자’의 문제, 그들의 “생동하는 물질성을 명료하게 표현”(9)하고자 한다. 베넷은 일종의 ‘사물-일원론자’이지만, 사물성을 ‘물질적으로만’ 보지 않고 ‘유물론적으로’ 본다. 사물 자체의 내부에 절대적인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사물 외에 별도로 사물을 행위하게 하거나(주체-객체의 관계를 상정하거나), 형성 충동 같은 것을 가정하거나(질료-형상의 관계를 상정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사물 자체가 빛나기 때문이다: 베넷은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엄청난 목록을 통해 우리가 형상이니 생명이니 영혼이니 하는 식으로 불러왔던 것들이 실은 ‘사물’ 그 자체의 힘, 사물-권력, 사물의 야생성과 절대성, 사물의 ‘생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유물론은 기존의 유물론처럼 관념론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관념과 같은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관념은 베넷에게서는, 사물을 통해 우리가 감지할 수밖에 없는 비결정적인 생의 약동에 대한 반동적인 반응 혹은 한 효과일 뿐이다. 이렇게 베넷은 라투르의 행위소 개념을 사물 속으로 강력하게 확장한 셈이다. 모든 행위는 ‘연합된/집합된 행위성’이며, 배치 내의 벡터다. 따라서 결국 행위소란 “간섭자(interventer)라고 할 수 있으며”(51), 스피노자가 “Deus sive Natura(신 또는 자연)이라 말한 것”처럼 “모든 양태는 그 자체로 많은 단일한 신체들의 모자이크 조직 또는 배치”(78)로서 네트워크 또한 확장된다. 베넷에게서 네트워크는 하나의 생태가 되는데, 여기서 환경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신적인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단일한 전체를,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가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라 말하는 것을 형성한다”(278).
6. 제이슨 무어의 ‘오이케이오스’
베넷이 특히 ‘개체성’을 완전히 해체한다면, 무어가 집중하는 것은 그가 모든 이원론의 원인, “근대성의 가장 신성한 대립쌍”(62)이라고 지목하는 “자연/사회 이항구조”다.
“실재는 [...] 그 대립쌍(자연/사회)의 역량을 압도한다. 그런데도 새로운 언어―생명의 그물에서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이 맺는, 더는 단순화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는 언어―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에는 시도가 모자라지는 않는데, 이를테면 사이보그, 회집체, 네트워크, 혼성물을 비롯한 많은 개념어가 제시되었다.”(24)
무어는 야심차게 새로운 개념어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이케이오스(Oikeios)’다. 짐작하겠지만, 그리스어(!)이고, ‘가까운, 친척인, 자신에게 속하는/고유한/적절한…’등을 가리키는 형용사(!!)다. 무어는 형용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데 대해 사과하지만, 사실 “역사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행위자의 특정한 배치에 달려있다”(75-76)면 행위성과 벡터와 배치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몸짓언어(형용언어)를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행위자와 네트워크를 ‘오이케이오스’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통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무어는 자신이 비판한 이원론을 ‘이중내부성’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인간조직은 생명의 그물을 내부화하고, 다시 그 그물에 의해 내부화된다”(461). 인간-자연과 비인간-자연이 있을 뿐, 자연과 별개로 사회, 국가,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이케이오스는 생명의 그물 속에서 ‘다발’로 되어 있는 ‘역사적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어가 ANT에서 A와 N을 합쳤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없던 것, 즉 ‘역사’의 문제를 도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넷이 자신을 신유물론자로 자처하며 ANT를 ‘생동하는 사물’의 절대적 신비 속으로 확장했다고 한다면, 무어는 ‘세계체제분석(월러스틴)’의 ANT적(的) 번역자로서 새로운 ‘세계생태론의 역사적 자본주의’를 써내려고 한다.
무어에 따르면 자본과 권력은 자연‘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그물을 ‘통해서’ 전개한다. 그래서 “근대성의 환경사에서 환경사‘로서의’ 근대성으로 문제를 전환”(87)하는 것, 즉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그가 제시하는 ‘얽힘’의 실제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이자 단위’로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결정한 문명이지만, 이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 가지 저렴한 자연(식량, 노동력, 에너지, 원료)’을 ‘전유’해야만 했다. 즉, 자본주의의 역사에는 노동시간을 유상으로 구매하는 동시에 무상으로 제공되는 인간-자연과 비인간-자연이 있어야만 한다. 자본 축적의 논리에서 잉여가치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적극적으로 생산되는 ‘저렴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자본주의는 이미 성인으로 양육된 후 임금노동현장으로 들어오는 생명(저렴한 인간-자연)을 통해서 전개되어왔다. 우리는 아동노동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진입연령이 높아지는 프론티어를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전혀 ‘도덕적으로 계몽된 자본가’ 혹은 ‘사회의 정책결정’ 때문이 아니다. 9살의 인간은 9년이라는, 30살의 인간은 30년이라는 ‘무상의 인간-자연’에 대한 전유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인간의 생명의 시간을 무료화하는 토대에 의해서만 성립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혁신한 산업노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의 “생물지질학적 과정을 통해서 산출된 화석연료의 형태로 축적된 것”(117)을 무상으로 전유함으로써만 가능했다. 따라서 “필요노동시간은 자본화와 전유를 통해서 ‘공동생산’된다”(350).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착취와 전유의 변증법을 통해서 작동한다”(43). 자본주의는 자연을 ‘전유정점’에 이르기까지 소진한 후 아직 자본주의에 의해 전유되지 않은 새로운 자연을 찾아 나서는데, 이것이 곧 장기 16세기(1450-1640)부터 1973년 신자유주의의 ‘저렴한 자연 재건 프로젝트’―이때 임금이 억제되고 중국-러시아-인도의 시장이 개방되었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팽창되었으며 과소소비가 강요되었다―를 거쳐 2013년 이 전략이 부식되기에 이르기까지의 상태를 특징짓는 자본주의의 프론티어화과정이다. 무어의 개념소들을 주목하라. 그의 오이케이오스[한] 세계생태체제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적 과정이 아니라 프론티어화로서 ‘역사적 프로젝트’요, ‘세계 실천’이다.
Work Cited
라투르, 브루노. 「행위자네트워크이론에 관하여: 약간의 해명, 그리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옮김. 서울:이음, 2010. 95-124.
―――――.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 혹은 어떻게 사물을 공공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옮김. 서울:이음, 2010. 259-304.
로, 존. 「ANT에 대한 노트: 질서짓기, 전략, 이질성에 대하여」,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옮김. 서울:이음, 2010. 37-56.
칼롱, 미셸. 「번역의 사회학의 몇 가지 요소들: 가리비와 생브리외 만의 어부들 길들이기」.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옮김. 서울:이음, 2010. 57-94.
무어, 제이슨.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Capitalism in the Web of Life: Ecology and the Accumulation of Capital, 2015), 김효진 옮김. 서울:도서출판 갈무리, 2020.
베넷, 제인.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ke University, 2010). 문성재 옮김. 서울:현실문화연구, 2020.
홍성욱, 「7가지 테제로 이해하는 ANT」.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옮김. 서울:이음, 2010. 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