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속글속(속속)에서 배우는 것들 (1-5)

by 장숙藏孰 posted Jun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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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장 유재 



1. 무엇보다 적경(寂敬)을 배웁니다. 모든 시작에 놓인 것, 모든 공부 꼭지의 사이에 놓인 것이 적경입니다. 명상(冥想), 참선(參禪)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적경이란 '낮은 중심'을 감각화하는 훈련이자, 그 상태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정한 대로''지금- 여기'에서 가부좌를 하고 호흡에 의념을 두는 것이 그 방식이지만, 그 길을 찾아 나가는 데에는 여러 방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장숙에서는 방식을 기본으로 방편들을 탐색해나갑니다.



2. 적경과 더불어 몸을 텍스트로 하는 어떤 활동들을 배웁니다. 이는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여러 동작들을 통해 여럿이서 어울려 움직여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떤 리듬()을 되찾고, 다른 리듬을 얻고, 그 리듬 속에서 각자의 몸을 돌보는 자신의 운()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가령 우임금의 걸음걸이(禹步)를 통해서는 두려움을 쫓고 명랑함을 되찾는 방식을 연습하고, 주천(周天)을 통해서는 우리 몸으로부터 발산하는 에너지를 신뢰하며/보살피는 방식을 연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은 우리의 청자(聽者)이자 우리의 장소라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합니다. 이것은 의료권력이 완전히 식민화한 몸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싸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몸을 장소화하고 듣는 덕()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3. 외국어를 배웁니다. 매번 한문을 배우고, 매번 적어도 한 문장씩, 중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외국어인 한글로 외웁니다. 모든 것을 외국어로 보는 연습을 합니다. 그것은 언어를 향한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의 도구이기도 한 것을 실재하고 날카롭게 갈고 벼리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링컨의 도끼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만약 나무를 벨 시간이 6시간 있다면, 그중 네 시간을 도끼를 가는데 쓰겠습니다(Give me six hours to chop down a tree and I will spend the first four sharpening the axe)." 우리는 함께 모여 바로 그 외국어-도끼갑니다.

 


4. 사람들은 '외국어(外國語)'를 배운다는 말에 항상 한걸음 뒤로 물러서지요. 다시 한걸음 우리에게 나와 오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열정을 지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삶 속에서 분명한 한자리를 얻을 수 있는 지속성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속속에서 만나는 것은 단지 한 문장씩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손잡이를 암연이장(闇然而章)'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언어입니다. 언어와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의 어둠을, 생활과 체계와 관계 속에서의 어둠을, 밝히는 한 문장입니다. 그중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쉬지 않고 / 不慌不忙,不休息 / Without haste, without waste ! / がずまず

 


5. 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책은 많으니 책이고, 사람은 많으니 사람이며, 의견도 많으니 의견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새로운 꼭지들을 도입하고, 가끔 숙인의 작은 강의(별강)를 듣 고, 새로운 책을 교재(敎材)로 삼아 공부합니다. 장숙은 기본 교양을 쌓는 평생교육시설이고자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문 연구를 하는 대학이고자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직 형식만 부르짖으며 수행을 일삼으려는 '대리종교'이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책과 사람과 의견 들 속에서 선생님의 태도를 반조(返照삼아 조각난 지혜를 얻으려는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 선생님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김영민 선생님께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보통 학교라는 제도(制度)는 선생을 도구화하는 법이지만, 우리에게는 선생님과 의 '만남'이 모든 것을 재편하는 매듭입니다. 공동체라고 했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의식과 틀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만남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누구 숙()'자 를 쓰는, '숙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으로 인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혹은 여전 히 기묘하게 가부장적인 가족주의, 이래저래 소외되고 비참해진 체계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 인가'를 다시 묻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어긋나고, 어긋내며, 그리고 그 물음을 살아내고 계신 선생님을 뒤따라, 자기구제의 길고 어둑한 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을 만났으므로 알게 된 그 이상한 '어려운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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