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 없는 구원 ∙ 神 앞의 철학
- 호모 렐리기오수스를 위한 철학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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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1. 글읽기와 지은이읽기
글읽기는 어느 정도의 ‘지은이읽기’를 물고 들어간다. 이를테면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시선 속에 나의 흔적이 빨려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이는 거의 상식으로 통용되는 말이지만, 잠시 이 상식의 상식성[commonsensicality]을 따져보기로 하자.
사실 글과 그 글을 쓴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일견 단순하고 일방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전문인들의 논의는 이미 현란할 정도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논의의 여러 갈래 중, 글에 비해서 지은이의 의미와 무게를 상대적으로 위축시키는 흐름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와류(渦流)를 만들고 있는 것도 같다. 비평계 일각에서 ‘저자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있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지은이에게 벗어난 글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마침내 모든 것을 글[기호]로 보고자 하는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아, 끔찍한 이름의 수입품이다―의 관점이 여러 모습을 띠고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텍스트를 중시하는 입장을 어떤 식으로든 간단히 평결(評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선 여러 입장 들을 층위의 변별없이 하나의 잣대로써 비교하여 우열등급을 매기는 짓은 내게는 너무 생소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 적실성이나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역사나 무의식마저도 언어 혹은 기호의 일종으로 보는 저들의 독특한 관점은 그 토양과 역사 속에서는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읽기를 하면서 지은이의 삶과 기질에 유의하는 태도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 위에서 말한 상식의 상식성은 바로 이 일리의 구조에 해당한다.
'일리가 있다'는 평가는, 그러한 평가의 대상이 되는 어떤 태도나 입장에 '이름이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만약 무조건적이고 무시간적인 어떤 진리가 있다면, 이는 그 진리의 절대성으로 말미암아 익명화(匿名化)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고쳐 말하자면, 역사와 정황, 곧 삶의 터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삶의 터에서 형성되어 나온 입장과 태도는 절대적인 진위(眞僞) 판정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터와 입장 사이의 관계, 달리 말하자면 콘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관련성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지은이와 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도 삶의 터와 논의의 층위[evels of discussion]를 변별하지 않은 채 맞비교되어서는 안 된다. 원칙적으로 하나의 사조나 관점이 실각한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서는 현상은 당시 사상계의 터와 풍향과 힘, 그리고 정신적 악센트를 반영한 세대교체의 성격에 가까운 것이지, 특정 사조와 이론의 진위 판정에 따른 설득의 결과는 아니다.
이처럼 다소 장황한 논의를 편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첫째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내 글쓰기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의 글읽기를 도와주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이다.(지은이의 글쓰기 철학은 지은이의 철학보다 먼저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리있음'[making-a-sense]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글쓰기의 철학을 포함한 내 글 전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시사하기 위해서이다.(지은이의 해석학은 지은이의 글쓰기 철학보다 먼저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 대목에서 하고싶은 말을 정리하자. '글읽기는 어느 정도의 지은이읽기를 물고 들어간다'는 말은 분명 글읽기의 상식에 속하는 진술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서는 내가 의도적으로 악센트를 두고 있는 글쓰기의 태도를 밝히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 태도는 소위 '개성적(個性的) 글쓰기' 방식을 가리킨다. 물론 지은이 자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쓰기 방식은 왠지 점잖치 못한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심지어 학문성마저 실추시키는 위험이 있다는 비판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은이의 조탁되지 못한 육성(肉聲)을 그대로 내뱉는 것을 들어 학문을 넘어 인격의 문제로 보는 전통적 시각이 만만치 않음도 알고 있다. 아쉽지만, 내 삶의 역사와 성향을 거르지 않은 채 개성적으로 글을 쓰고자 하 는 이유를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또 그 배경의 일부는 이 책의 본문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은이를 적극적으로 노출시키면서 글을 쓰는 방식과 관련해서 꼭 지적해 두고 싶은 점은, 지은이가 글 뒤에 숨어버림으로써 그 의 권위가 살아난다는 병약한 태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철학과 종교의 화해
이 땅에서의 철학은 다소 특이할 만큼 종교 및 신학과 학제적(學際的) 상보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못한 것이 그 솔직한 실정이다. 서구가 그 기층에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신학과 종교의 문화였는지를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철학과 종교의 접선(接線)이 잉태하는 이슈들이야말로 '철학의 영원한 문제들'[the perrenial problems of philosophy]이었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울 필요도 없다.
물론 서구에서는 장구한 세월동안 철학과 신학이 병존(竝存)해 오면서, 가장 철학적인 탐구의 일부를 언제나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전담해 왔던 배경이 있다. 선교사 풍의 속악한 신학과 샤마니즘적 종교가 판을 치던 풍토에서 명색 엘리트임을 자긍으로 삼던 철학자들이 먼저 선뜻 악수를 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변했고, 이제는 타성 속의 고독을 씹을 계제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세월이 어떻게 변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지를 여기서 상론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단지 세월탓으로 하는 말도 아니다. 잠시 언급 했지만, 철학과 종교• 신학은 이미 탐구의 주제면에 있어서도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해야하는 당위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 땅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이유와 배경에서 진솔한 만남을 회피하고 있다. 가령 한 쪽을 몽매주의[obscuranism ]로, 다른 쪽을 불경건으로 매도하는 일부의 태도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물리학과 철학이 만나고, 사회학과 종교가 만나고, 문학비평과 역사학이 만나고, 자연신학과 생물학이 만나고, 풍수학과 여성학이 만나고, 정치학과 언어학이 만나고, 시학(詩學)과 정신의학이 만나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마침내 나와 그것[it]이 반갑게 만나고 있는 지금, 이 땅 위의 신학•종교와 철학은 악수는 커녕 장갑도 벗지 못 한 채 스스로의 지평을 배타적으로 고립시키는 몰상식과 시대역행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땅 위에서 계속되고 있는 철학과 종교의 근거없는 반목과 불신이 이 책의 한가지 모티브가 되었다. '철학의 영원한 문제들은 대체로 철학과 종교의 접경(接境)에서 생긴다'는 인식 아래, '모든 철학의 주변부는 다 종교철학이다'는 가설을 이 책의 단초이자 그 정향(定向)으로 삼았고, 아울러 이를 철학과 종교의 불화를 보다 근원적으로 해소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설정한 셈이다.
턱없는 오해와 질시를 떨어버리고, 철학과 종교 사이의 섣부른 결탁이나 무리한 예속이 아닌 화해는 비교의 긴장과 창조적 상보(相補)를 통해서 각자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고 보편화시키는 호혜를 가져다 줄 것이다.
3. 탕자(蕩子) 인문학을 위하여
이 땅의 인문학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개발독재와 왜곡된 자본주의 문화의 와중에서 우리 인문학의 전통은 절맥(絶脈)의 수모를 당했다. 서구에서 쫓겨난 후 올데갈데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경박하고 직절(直截)한 과학적 실증주의가 여전히 이 시대 지식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망령으로 군림하고 있고, 서구 추수(追隨)주의의 줏대없는 타성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삶터의 질감과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이 이 땅에서 어떤 식의, 그리고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박해를 받아왔는지 일일이 들먹이는 짓은 되려 부끄러울 뿐이다. 이 땅의 인문학자들은 누구인가? 효자 자연과학도 아니고, 적자(嫡子) 정경(政經)과학도 아니고, 맷집좋은 사회과학도 아닌 인문학은 무엇인가. 이 인문학에 매달려 오해와 시의 그늘 아래 소득없는 열정을 불태우는 우리 탕자들은 누구인가?
이 책은 이 탕자들의 명예회복, 혹은 그들의 집찾기를 위한 아주 조그마한 시도이다.
4. 초월의 일상성, 일상의 초월성
철학이 우리 삶터 속의 일상에 주목하는 것은 다만 독자대중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난해하고 일견 공소해 보이는 내용에다가 문체마저 부자연스러운 번역투의 짜깁기이고, 게다가 삶의 일상 속에서 아무런 적용력을 보이지 않는 철학 전문서적을 옆집 영희 아빠나 앞집 철수 엄마가 사 볼 것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 다.
어떤 식이든 임상(臨床)이 없는 학문은 허황하게 보이기 쉽고, 사유의 깊이마저 궤변으로 매도당하기 쉬운 법이다. 가령 의사나 변호사나 국회의원이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근원적 이유는 바로 이 임상성이 그들을 위한 수혜권력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써야 하느니 어쩌니'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자. 그러나 우선 임상성에 대한 배려만으로도 삶의 구체적 일상은 반드시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단서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헤겔이 비판받는 것은 체계만들기[system-building]에만 광분했다는 점 보다는 오히려 그의 전문성이 삶의 임상에 맞닿아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이다. 전문성과 임상성의 상호 피이드백 과정은 특히 인문학이 체계적으로 폄하(貶下)당하는 이 땅에서는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다.
이 책은 이 피이드백 과정을 '일상 속의 초월'이라는 경험으로써 나타내고자 한다. 초월이나 구원은 철학적 인식의 범주이기 이전에 소중한 종교적 경험이므로, 만약 이러한 예시(例示)가 설득력이 있다면 철학과 종교의 화해는 물론, 일상성과 세속성을 철학 속으로 수렴하는 데 대단히 귀중한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일상화나 세속화를 말하는 이들조차도 그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옮겨 잡된 세속의 이야기들을 직접적•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의도가 없어 보인다. 자신의 삶터 속에서 주어지는 경험에 공평하지 못한 채, 칸트나 하이데거의 밑이나 닦다가 마는 것으로 학자행세를 마감하는 우리들의 불행하고 줏대없는 패턴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 인가. 명색 보편성의 계관을 노리는 학자들에게 민족이나 국가색으로 등번호를 달자는 국수주의적 발상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새삼스럽게 무슨 리얼리즘 논쟁의 한 귀퉁이를 얻어보자는 뜻도 아니다. 내 삶터의 가운데에서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이 전적으로 배제된 채 이루어지는 사유와 글이 대체 무엇을 위한 짓인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자는 말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그 논문의 형식성이나 짜 맞추는 것으로서 근근이 학자행세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조차 믿지 않는 바로 그 논문의 형식으로써 학자의 문턱에 서성이는 학생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이 땅의 학자들이란 대체 누구인지 반성해 보자는 말이다.
구체적이고 사소한 삶의 이야기들로부터 초월과 구원의 경험을 발굴하려는 시도는 인문학의 글쓰기에 대한 반성과 인문학자로 행세하는 우리들의 정체확인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일상의 초월성 초월의 일상성'이라는 상호연관성을 확인하는 일은 향후의 인문학이 스스로의 고유함과 이웃과의 연대성을 아울러 살리면서 자신의 역사를 일구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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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와같은 정신과 바램, 분노와 신뢰 속에서 씌어졌다. 오히려 책의 내용이 그 정신을 어지럽히고, 그 바램을 서운하게 만들고, 그 분노를 배신하고, 또 그 신뢰를 의심하게 만드는 증표가 되어 되돌아 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 없지 않다.(어차피 모든 글이 부메랑이긴 하지만.)
내 젊음의 삼년 간을 후회없이 보낸 감리교 신학대학 종교철학과와 그 학생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루지 못한 꿈도, 아름다운 기억도 함께 책 속에 담아 한때 내 제자였던 그들에게 돌려보낸다.
아, 동기(同氣)여, 감응(感應) 하라!
1994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