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는 부산대학교를 졸업한 후 워싱턴 대학에서 석사학위, 드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대 재학중 한국고등교육재단(KFAS) 대학특별장학생, 국제로타리재단(IRF) 대학원 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1989~1990년 판 Who is Who among Students in American Universites and Colleges 에 실리기도 했다.
현재 전주 한일신학대학 인문사회학부의 철학 담당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인문학연구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과 상상력, 『서양 철학사의 구조와 과학, 「현상학과 시간』 「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 『복잡성의 철학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등이 있다. 그 외에 여러 지면을 통해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현재 부산일보,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 계간 「시와 사상』, 그리고 「비평건축」 등에서 철학과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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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무릇 서문이란 대체로 사족이거나 반칙이다. 슬그머니 담을 넘어 들어가서 본문을 옹위하는 병풍을 둘러치거나 어쭙잖은 변명의 구실을 마련해놓으려는 글은 사족이며, 부실 공사의 틈을 메우려고 뒤늦게 땜질하거나 진상을 호도하는 연막을 치는 글은 반칙이다. 책에 관한 논의라면, 본문이야말로 한 세계의 조건이며 그 한계인 것이다.
따라서 글쓴이의 입지와 지평이 있다면, 그것도 그 조건과 한계 사이의 긴장을 창의적으로 조율하는 행위 속에서만 열린다.
다만 여기 몇 마디 췌언을 고집하는 것은 서문으로 책의 성격과 그 의도를 미리 밝혀서 전체의 지형을 조감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주려는 심정이 지나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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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여러 곳에서 내 학문의 방법적 지표를 개방성, 학제성(學際性), 그리고 역사성으로 정리해본 적이 있다. 이 지표는 이 책에서도 계속 향도(嚮導)의 구실을 한다. 분류해서 셋이지만, 논의가 깊어지면서 당연히 하나로 만난다. 세 지표가 서로 교호해서 학문성의 실질을 구성하고, 이로써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경을 엮어내는 것은 삶과 앎 사이의 통풍(通風)이 이루어내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역사성이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범주로 쓰인다. 학문성조차 역사성의 하위 개념이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예시 된다. 마찬가지로 글쓴이로서의 나도 줄곧 '역사의 힘에 깊이 찬탄하는 자'로서 본문의 안팎에 등장한다. 내게는 글쓴이를 숨겨서 진리만 을 드러내려는 강박이 없다. 오히려 내 입장과 지평, 그리고 그 스타일을 드러내어 삶의 맥리(脈理)들을 하나하나 잡아나가려고 한다. 독자들도 나와 함께 그 찬탄 가운데 개방성과 학제성이 어우러져서 자생(自生)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의 여러 논의에서 중심을 이루는 개념은 컨텍스트와 패턴이다. 인문학의 안팎에서 명멸하는 여러 테제와 쟁점들이 이 두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자리매김되면서 그 물음과 답변의 현장이 새롭게 구성될 것이며, 감추어졌던 주변과 이면(裏面)의 깊이가 조심스럽게 떠오르게 될 것이다.
컨텍스트주의contextualism는 금세기 학문사의 공분모를 이루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그 자체로는 별스러울 것이 없다. 내 관심은 이 낡은 개념을 다시 철학적으로 정리하거나, 그 층층면면을 이론적으로 천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살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해와 대응의 과정 속에서 논의의 층위나 깊이, 혹은 그 대상이나 영역에 상관없이 이 개념이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예시되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물론 이러한 노력의 형식적 측면은 내가 이미 여러 글을 통해서 계발∙전개하고 있는 '글쓰기 철학'의 조정과 배려를 받고 있으며, 이는 다시 "앎의 궁극적 권리 원천은 삶이며, 따라서 앎은 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출구지평(出口地平)의 개발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는 내 학문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패턴(화)Patem(ing)은 내가 주창하고 있는 '일리 해석학'이 예시 되는 가능성의 한 갈래로서 그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패턴을 주제화시키는 것은 근대의 인식 중심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요소론(要素論)에 대한 비판이며, 무시간성에 경도했던 철학을 삶의 시간과 터에 옮겨 놓으려는 시도이고, 철학의 길이 단발의 타깃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연발의 지형을 그리는 것에 있음을 보이려는 결의다. 이는 시효를 넘긴 진리(眞理)의 독선과 입술만 날름거리는 무리(無理)의 자조를 모두 넘어서서 일리(一理)의 유연성과 보편성을 통한 제3의 해석학적 지평을 앞당기려는 노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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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대부분은 1994~1995년 사이, 교수직을 사임하고 낙향해서 보낸 2년 사이에 씌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간단한 교정만으로 눈가림할 수 없을 만치 생각의 틈이 생긴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학 문은 우선 역사이니, 내 역사를 보듬어나가야 하는 것도 내 학문일 터.
그간 내 작업을 주목하고 후원한 분들이 적지 않다. 낱낱이 적어 감사드리고 싶지만, 다만 마음에 새겨 내 학문의 심지를 굳히는 정표로 삼고자 한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어둡고 어려웠던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그 난황(難況)을 내 정신의 난황(卵黃)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 이왕주 교수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 내게 하나만의 이치에 죽을 밝은 눈은 없으나, 하나의 이치에 죽을 어두운 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1996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