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영화인문학, 글항아리, 2009

by 장숙藏孰 posted Jul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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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_ 영화인문학과 비평의 새 가능성

 

 

철학과 인문학이 제아무리 왜장치듯 지랄知剌을 부린다고 해도 그것은 곧 삶의 한 형식일 뿐입니다. 긴밀하고 슬금하기만 하다면 그 무엇을 두고 응하든 공부의 이치들을 쟁여나갈 수 있으니, 인문학의 기원이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복잡성complexity’ 이나 '문화文化등의 개념을 매개로 근대의 분과학문을 재통합하려는 노력이 눈에 띄곤 합니다. 인간의 지식활동이 모짝 과학주의의 토대와 분과주의의 틀 속에서 운용되는 긴 과정이 그 구체적인 비판의 칼을 맞은 셈이지요.

 

나 역시 비슷한 관심과 고민 속에서 삶의 근원적 복잡성을 지닌 현실에 응하는 이치로서 일리一理와 그 맥리脈理를 헤아리고 밝히는 기획을 지속시켜가며 우리 인문학의 탈식민성과 자생성을 위해 애쓰기도 했습니다. 분과주의는 근대적 제도의 한계이자 조건으로서 보다 일반적인 층위에서 논의, 비판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기지촌 지식인' 의 관행과 무의식을 떨쳐내고 결국 분과의 권력 이해관계로 구조화된 지적 식민성의 그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지근지처의 섬세미약한 이치들로부터 인문학, 혹은 학문 전체의 미래 형식을 조형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학제 간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라는 사이비 통합이 국가의 그늘과 자본의 토양에서 학문권력의 재분배에 몰두하는 사이, 근대의 제도적 학문분과나 진선미의 칸트적 구별을 근간에서부터 허물어지게 만드는 새로운 필요와 현실적 요청이 적지 않습니다. 학문통합적 창의성으로부터 퓨전fusion의 상상력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 이르기까지 이미 해체와 통합의 기운은 끝간 데 없이 아카데미아의 안팎을 흔들고, 심지어 학과 술의 구분마저 미심쩍은 터에 삶의 층층켜켜에서 틈틈이 새롭게 생성되는 갖은 이치에 마치 처음인 듯 유의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실입니다.

 

학과 술을 아우르는 그 모든 공부의 행위는 결국 인문人紋에 되먹임 되는 이치의 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소재나 영역, 매체나 방법론 등을 잣대로 공부길을 낱낱이 분기시키고 제도적으로 안정화시켜서 근대 학문의 전문성을 얻었으며 이는 그 나름의 다대한 성취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이치의 텃밭(밑절미)인 것처럼, 몸의 움직임과 그 관계의 총체성인 인문은 바로 그 이치들에 닿아 있기 마련입니다. 복잡성, 문화, 생태, 그리고 매개media 등등의 개념을 통해 학문 통합의 기운이 되살아나는 것은 일견 당연하지만 이것들 역시 장르와 갈래, 소재와 방법론을 재분류하는 차원에서 재구성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칸막이방compartments을 지닌 인공의 고층건물을 다시 뒤섞음reshuffle 한다고 해서 그 인공성의 장막을 걷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보다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상상력 속에서 서서히 풀려나갈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공의 칸막이 자체의 가치나 효력이 급격히 숙지거나 무화되는 지점으로 찾아들어가는 탐문의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 하는 갖은 이치들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몸과 삶이 소외되지 않는 통합적 학문, 그 인문학人紋學속의 바탕을 얻는 희망일 것입니다.

 

그 같은 미립과 이치, 그리고 그 맥리脈理를 살피고 헤아리는 곳이 영화여도 상관없습니다. 영화의 내용(서사), 삶의 복잡성이라는 인학적 근본 현실 속을 종횡하면서 의도 밖의 시공간에서 결절하는 이치一理를 간결하게 형상화하는 데에 극히 효과적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의 형식은 단지 문화 연구나 매체론의 관심거리로만 그치지 않고 자본제적 실용화와 처세화, 그리고 키치화로 내몰려가는 근년의 인문학적 여건 속에서 주요한 의제로 그 가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영화 여도 상관없다"는 말은 이 같은 시속의 양가성에 주목한 것이며, 미래 인문학적 탐색이 적절한 긴장과 비평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업주의에 포박된 영화 매체와 창의적 교육적heuristic 관계를 맺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영화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영화인문학'은 역설적으로 영화와 인문학 사이에 아무런 필연성을 전제하거나 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을 창의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에 기댑니다. 기술 일반이 그러하듯이 매체로서의 영화는 역사적 우연일 뿐입니다. 이 우연의 가치를 평가하고 이에 비평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인문학의 선택일 뿐이지 필연도 선험적인 요청도 아니며, 무슨 시대의 과제인 양 떠벌릴 것도 아닙니다. 영화의 매체적 중요성은 그 대중적 파급력과 편이성에 기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얹혀 있는 볼거리사회spectacle society, 모의사회simulation society, 거울사회 mirror society, 혹은 소문과 고백의 사회 와 깊이 연루되고 있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독점이 문제' (F. 브로델)고 기술이 아니라 기술의 집중이 문제' (J. 엘루)라면, 영화 매체로 대변되는 이미지 문화의 독점과 집중은 우선 인문학이 선손을 걸며 매섭게 비평적 개입을 해야 하는 대목일 수밖에 없겠지요.

대중의 영화 보기가 온통 소비자본주의의 상업적 코드 속으로 회수되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이 시대의 '증상이기도 합니다. 증상이란 곧 말하고 싶은 것을 잘못 말하는 방식이라면 비평이란 다시/고쳐 말하기로서 그 증상을 뚫어내는 재서술의 천공술穿孔術과 같은 것입니다. 증상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이 에너지는 다시 대중의 표준화체계화한 취향을 북돋고, 작은 차이 속의 환상과 시뮬라크르에 끊임없이 움찔거리는 대중의 취향은 그 상업적 체계를 되먹이거나 변명하는 데 다시 동원됩니다. 개인=체계가 서로 구성적으로 연루된 이 악순환의 와류渦流에는 곧 비평의 난맥상이 한몫을 합니다.

 

내남없이 영화에 쏠리며 '영화비평'이라는 속없는 이름 아래 언죽번죽 입을 놀리는 것도 볼꼴사납긴 합니다. 정녕 새로운 비평의 철학이 긴절하게 필요한 시점이고, 아울러 철학과 인문학은 그 사상누각에서 나와 비평의 현실성이나 현재성과 손을 잡아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나 영화비평이라는 그 속되고 누추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시속의 유행이나 대중의 취향을 버르집고 따져 그 이치들의 맥을 잡고 거기에 틈타는 구조와 체계를 유형화시키며 이로써 (체계의 욕망이 아닌) ‘외부성의 희망'을 조형해내는 노력은 뜻있는 일이니, 다시, 영화여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이 내세우는 영화인문학이란 그저 영화여도 좋을 뿐이라는 취지가 아닙니다. 분명히 영화가 특권적 매체로서 대중적 관심의 총아로 군림하는 행태에는 실없고 맨망스러운 데조차 있으며, 산업의 메커니즘 속에서 체계에 복무하는 또 하나의 갈래에 머물거나, 혹은 영화에 결절하는 이치가 인문人紋이 아니라 유행의 얼룩에 그치는 일이 잦긴 합니다. 그러나 영화(매체)이기에 더 나은 지점들을 통해 생성되거나 조형되는 이치들과 그 맥리를 톺고 간추리는 일은 경제사회학적 토대에 관한 이해에서부터 정신분석학적 증상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분명 생산적이며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여기에 제시된 '영화인문학'은 영화를 매개로 삼는다는 명분과는 다르게 전문 분과주의나 장르주의적 글쓰기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적 이론이 아니라 "삶의 층층켜켜에서 틈틈이 새롭게 생성되고 숙성되는 갖은 이치들"의 차원에서 보자면 논의의 마당을 매체 중심적으로 구심화전문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치와 그 삶의 패턴으로 구성되는 인문은 어느 특정한 매체에 특권적으로 결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조건과 한계를 밀고 당기면서 어떤 매체, 어떤 관계, 어떤 체계와 제도, 그리고 어떤 식의 관습과 버릇 속에서도 쉼 없이 생성되고 변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 속의 영화인문학은 인간의 안팎이 서로 스치고 겹치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그 무엇에서든 맺히게 마련인 이치들과 그 인문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물론 그 매개가 영화'인 것은 우연이지만 그것은 오직 인문학적 비평 앞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우연이니, 우연조차 그 역사와 체계의 테두리와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인문학입니다.

 

다 아는 대로 인문학은 급속히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제도권의 인문학은 국가와 기업의 문어발에 기식하는 게 능사인 듯하고, 세속과 일상 속으로 진입하려는 인문학은 모짝 키치화하거나 처세화의 정해진 차례를 밟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탈학교의 상상력을 폈던 일리치I.Illlich의 말처럼 교육은 젊은이들을 경쟁적인 소비자, '마지막 인간'(니체)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게 손에 잡힐 듯한 현실입니다. 낮의 이명박과 밤의 강호동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는 짝패를 이루어 인문학적 진지함이나 가치와 '소통' 할 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영화인문 학'을 내세운 이 글은,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매체로 떨어진 영화(보기) 속으로부터 전래의 인문학적 가치와 생산성, 그리고 새로운 진지함을 톺아보고 구제하려는 시도입니다.


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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