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회 속속,발제: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를 넘어 정치의 길을 보다'

by 늑대와개의시간 posted Aug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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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16, 189회 길속글속 발제문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를 넘어 정치의 길을 보다

 

 

발제: 孰人, 임미애

 

저자 김선욱은 한나 아렌트의정치적 삶에 대한 여러 층위의오해들을 바로잡으며, 그녀의 삶을 따라 형성된 철학적 여정을 통해 그 사상의 진면목을 소개합니다. 아렌트 개념들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그녀의 구체적 경험과 보편적 사유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형성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전통적 위계의 재고

1-1. 한나 아렌트 사상에 대한 '오해''활동적 삶'의 진정한 의미

한병철 교수가피로사회에서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vita activa)' 개념을현대 사회 피로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오해입니다. 아렌트에게 '활동적 삶'은 단순히 과도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삶,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은 철학자의 삶을 의미하며, 그녀의 주요 저서인간의 조건과 말년작정신의 삶은 각각 이 두 삶의 양 축을 이룹니다.

1-2. 전통적 위계 비판과 두 삶의 조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철학자의 삶을 정치가의 삶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한 전통에 대해, 아렌트는 이를 철학자들의 편견이라고 지적합니다. 서양 철학 전통에서 '관조적 삶''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정치적 행위를 왜곡시켰던 것이며,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삶의 중요성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아렌트가 '활동적 삶'을 단순히 더 중요하게 본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정치적 활동과 철학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차원을 지향했습니다. 정치적 삶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2. 진리의 문제와 정치: 플라톤 비판과 정치 복권

2-1. '정치철학'을 거부한 이유와 플라톤 비판

아렌트가 자신을 철학자가 아닌 정치 사상가라고 부른 이유는 '정치철학'이라는 개념 자체를형용모순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하나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다름을 거부하는 반면,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plurality)''다원성(diversity)'을 바탕으로 합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죽음에 대한 상처 때문인지 '보편적 진리' 중심으로 정치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개성에 바탕을 둔 다원성의 장'인 정치 영역을 파괴할 수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합니다. 오히려 스승의 뜻을 잘못 해석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정치의 중심은 '진리'가 아니라 '의견(opinion)'이며, 이러한 인식은 그녀가 직접 경험한 전체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2-2. 특수성과 보편성의 조화

아렌트는 '세계시민이냐 민족이냐'와 같은 대립적 구도를 넘어,‘유대인으로서의 개인적 특수성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성을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정치사상을 제시합니다. 그녀의 유작정신의 삶에서 다루고자 했던 '판단'은 특수성 속에서 보편적 차원을 놓치지 않는 인간 정신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 부분이 미완성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후학들의 연구를 통해 그 개념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1]

 

3. 삶에서 우러난 정치사상: 보편적 사유와 특수적 경험의 조화

3-1. 철학적 배경과 유대인 경험

아렌트의 사상은 하이데거, 야스퍼스, 아우구스티누스와의 지적 교류와 유대인으로서의 특수한 경험이 결합하여 형성되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죽음 지향적' 사상과 대조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배운 '탄생성(natality)' 개념에 주목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렌트의 특수한 종교적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기독교 교부 철학자로, 그녀가 '오랜 친구'이자 '평생의 지적 동반자'로 여겼을 정도로 깊은 애착을 보인 사상가였으며, 나치 독일을 탈출할 때도 그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 원고를 챙겨 나올 정도였습니다. 야스퍼스에게서는 특정 관점에 갇히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 관찰자(world spectator)'의 시각을 배웠는데, 이는 후에 아렌트가 유대인이면서도 시온주의를 비판하고, 이스라엘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2]

한편, 나치 시대를 직접 겪으며 그녀의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면모가 드러납니다. ‘시온주의자는 아니었지만당면한 위협에 맞서 유대인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이었기에 그녀는 시온주의 조직들과 협력했고, 구르 수용소에서는 위조문서를 통한 탈출을 선택하여 생존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도덕적 원칙에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비밀경찰 심문과 구르 수용소에서 '권리가 없는 사람들(stateless people)'의 문제를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중요한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고, 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연방 국가 건설'을 제안하는 구체적 아이디어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특수한 경험과 인류 전체의 보편적 문제를연결하는 아렌트의 삶은 그녀의 대표작으로 승화됩니다.

3-2. 전체주의의 기원: 경험의 학문적 승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렌트의 이런 삶의 경험은전체주의의 기원(1951)이라는 기념비적인 저술로 집약됩니다. 이 책은 전체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서로, 그 목적은 단순한 비난이나 용서가 아닌 '이해(understanding)'에 있습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이해'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했는지를 철저히 분석하여, 그러한 끔찍한 사태가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필연적 과정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이 책에서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전체주의라는 개념 아래 어떻게 연결되고 작동하는지 분석하며, 특히 '테러(terror)''이데올로기(ideology)'가 전체주의 체제의 핵심 장치임을 탁월하게 밝혀냅니다.

특히 그녀는 테러의 대상이 별것 아닌 이유로도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는 일상적 삶 자체를 얼어붙게 하고 소통과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사람들의 삶을 전체주의로 몰아가게 됩니다. 이데올로기가 삶을 어떻게 통제하는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며, 그녀가 이후 인간의 조건에서 전개할 '정치의 회복'이라는 과제의 절실함을 보여줍니다.[^3]

 

4. 정치의 회복: 정치의 본질과 복권의 길

정치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가 일어나는 '장소''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근대 이후 '사회적인 것'이 어떻게 정치를 잠식했는지 진단한 후, 인간 활동을 노동-작업-행위로 구분하여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4-1. '사회적인 것'의 등장과 정치의 실종

아렌트는 '사적인 것(the private)''공적인 것(the public)'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은 초기 여성주의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에서 이 개념들이 여성을 가정이라는 비정치적, 사적 영역에 가두고 남성의 영역은 정치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역사적 맥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후에 여성주의자들 가운데 아렌트의 개념을 통해 오히려여성주의 철학의 길을 발견해내기도 한다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여성이라는 특수성과 세계라는 보편성을 넘나들며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그녀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후대에 계승되고 발전되는 양상으로 보여집니다.[^4]

그러나 아렌트의 구분은 고대 그리스 폴리스 분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유주의적 전통과는 본질에서 다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정(Oikos)'은 생존의 필연성이 지배하는 사적 영역이었고, '폴리스(polis)'는 시민들이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는 공적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로 넘어오면서 원래 사적 영역인 경제가 국가적 관심사로 확장되고 변질되면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등장합니다. 이로 인해 경제적 활동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진정한 '정치적인 것', 즉 자유롭고 다원적인 '행위'가 설 자리를 잃는 '정치의 실종(disappearance of politics)'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현대 사회를 이해할 중요한 개념 틀인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 복권을 논합니다.[^5]

4-2. 노동, 작업, 행위: 정치 복권과 마르크스 비판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합니다. 이는 '활동적 삶'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이며, 각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노동: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반복적이고 필연적인 활동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영역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시민의 자유로운 정치 참여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작업: 인간이 항구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여 수행하는 활동입니다. 예컨대 건축이나 물건 제작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하며, 그 산물은 오래 지속됩니다. 찰스 테일러가 노동과 작업을 구별하며 환경 파괴 문제를 지적한 것처럼, 아렌트는 이 구분을 통해 인간의 창조적 역량과 세계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행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는 가장 본질적인 정치적 활동입니다. 이는 말(speech)''행동(action)'을 통해 이루어지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 한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정치의 핵심은 언어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가진 개개인들이 서로 소통하고 조정하며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4-3. 마르크스 비판: '정치 없는 세계'의 위험성

아렌트는 이러한 세 가지 활동의 섬세한 구분을 통해 인간의 존재 조건을 명확히 하고, 특히 근대 이후 정치의 본질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려 했던 마르크스(Marx) 사상의 한계를 비판합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는 플라톤의 것과 유사한 종류의' 오해'를 범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극복하려 했지만, 그의 사유는 경제적 필연성으로부터의 해방과 물질적 풍요를 통해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이해에 터 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의 본질적인 요구, 즉 인간의 가장 고유한 능력인 '행위''정치적 삶'의 가치를 간과한 것입니다. 결국 '정치 없는 세계(world without politics)’라는 이상향이 실은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한 디스토피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아렌트는 경고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노동, 작업, 행위가 모두 필요하지만, 특히 '정치적 행위'를 잊고 사는 것이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아렌트는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그녀의 주장은 정치의 회복, 곧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복권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5.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의 본질

5-1. 세기의 재판, '평범한 악'의 발견

한나 아렌트는인간의 조건을 집필한 이후, 세상을 뒤흔든 역사적 사건과 마주하며 인류에게 가장 충격적인 통찰 중 하나인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 개념은 그녀가 이전 저작에서 다루었던 악의 개념과 대조되며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1960,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나치 전범 칼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되면서 세기의 재판이 시작됩니다. 아이히만은 나치 정권에서 유대인 학살을 위한 수송 및 조직 체계를 '탁월하게' 설계하고 운영했던 실무 책임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광기와 증오에 사로잡힌 괴물 같은 악인으로 상상했지만, 재판을 직접 참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 아렌트가 목도한 아이히만은 모두의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특별한 악마적 면모를 보이지 않았고, 정신과 의사들조차 '지극히 정상'이라고 진단할 만큼 평범하고 심지어 가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아렌트는' 평범한 악(banal evil)' 또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게 됩니다. 이는 아렌트가 1951년에 출간했던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유대인 학살을 '총체적인 악(the total evil)' 또는 '근본 악(the radical evil)'이라고 규정했던 것과 대조됩니다. '총체적인 악'이나 '근본 악'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발현되는, 용서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악을 의미한다면, '악의 평범성'에서의 '평범성(banality)'은 진부함, 일상성,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을 뜻합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은 특별하거나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생각 없이 저질러지는 악의 형태였습니다.

5-2. '악의 평범성'의 본질: '사유의 불능'과 현대인의 그림자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은 바로 '사유의 불능(thoughtlessness)', '무사유'에서 비롯됩니다.

사유(thinking)의 진정한 의미: 아렌트에게 사유는 계산 능력이나 단순히 지식을 인지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이주 및 수송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만큼 계산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여기서 사유는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타인의 입장에 서서 공감하며,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정신 능력(mental faculty)을 의미합니다.

아이히만의 항변과 칸트 오독: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자신은 칸트(Kant)의 실천이성비판(Critique of Practical Reason)을 읽었으며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칸트의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을 오독했다고 지적합니다. 정언 명령은 '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평등한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보편적 적용 가능성(universalizability)을 고려해야 합니다. ,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률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의 오해는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법을 자신의 '보편적인 도덕 법칙'으로 삼고,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나치가 멸망한 바로 그 순간까지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가스실로 보내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망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스스로를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주어진 명령에 충실한 '좋은 시민'이었다고 항변했습니다. 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아렌트는, 법을 잘 따른 '평범한 시민'들이 나치 공범이 된 이유가 바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따르는 법칙이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는지 의문을 가지거나 질문하지 않았고, 게을리했거나 두려워서 양심을 무시했다고 아렌트는 분석합니다.[^6]

무사유의 징후: '평범한 악'은 언어와 태도에서 그 징후를 보입니다. 그 징조는 말과 표현에서 나타나는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주어지는 질문이나 자극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며, 상투적이거나 정형화된 표현에 매몰되어 있거나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아렌트 스스로 아이히만에 대해 "진정으로 클리셰(cliché)가 아닌 문장 하나를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문서 말투가 그의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고 언급할 정도로, 아이히만은 관공서의 상투어나 표어로 가득 찬 언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고 재판 내내 '말의 고착화' 현상을 예시했습니다. 심지어 사형 집행 직전,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와 같은 장례 연설에서나 쓸 법한 진부한 표현을 뱉었는데, 아렌트는 이것을, 그가 죽음을 앞두고도 사유하지 못한 채 정형화된 언어에 갇혀 있었다는, 충격적인무사유의 최종 증거로 보았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수행한 행위의 의미를 묻지 못했고, 그 결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이 부재했습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모습이 주어진 일을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수행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고 경고하며, 악이 특별한 괴물의 얼굴이 아닌, 무사유라는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5-3. 악의 평범성 개념에 대한 논란과 아렌트의 메시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 개념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과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대인 말살을 수행했던 악마 같은 존재에게 '평범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은 일부에게 유대인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나 아렌트, 당신이 이스라엘의 딸이냐?"와 같은 비판도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 양심적인 유대인 집단에서는 아렌트의 통찰을 깊이 인정하고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비단 나치의 만행을 넘어, 인간의 정신 능력, 특히 '사유(thinking)''판단(judging)'의 중요성을 현대 사회에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6. 아렌트의 공화주의: 사유와 행동으로 이끄는 정치사상

6-1. 사유의 탐구: '정신의 삶'과 판단의 미완 과제

아이히만과 만남은 아렌트에게 인간 정신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습니다. 특히 '악의 평범성'이라는 통찰 이후, 그녀는 '사유의 불능(thoughtlessness)'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의 유작인정신의 삶으로 나타나는데, 이 책은 인간 내면의 활동인 '사유(Thinking)', '의지(Willing)',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겨진 '판단(Judging)'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탐구합니다. 아렌트에게 '판단'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것을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차원을 놓치지 않고, 그 특수성을 잘 살리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었기에, 이 부분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많은 학자에게 아쉬움을 남기면서도 동시에 후학들에게 중요한 과제를 남겼습니다.[^7]

6-2. 행동하는 지성: 공공 지식인으로서의 현실 정치 참여

동시에 아렌트는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 현실 사회의 주요 이슈들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글을 썼습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종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학생 운동 등 당대의 핵심 문제들을 다룬 글들이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를 통해 발표됩니다. 또한,혁명론(On Revolution)과 같은 저서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과 정치적 자유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아렌트의 이러한 작업은 공화주의적 사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미국 공화주의(American republicanism)에서 바람직한 면모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 안에 깃든 문제점들에 천착했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에서 과거의 전체주의를 분석했던 아렌트는, 이러한 현실 비평 작업을 통해 미래에 다가올 수 있는 전체주의에 대한 대비이자 경고의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그녀의 사상은 후대의 새로운 공화주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저변에는 공동의 세계를 위한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씨앗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의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이론가들은 아렌트의 '행위(action)' 개념과 정치적 소통에 대한 통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시민들 간의 대화와 토론을 통한 민주주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8]

6-3. 구체성과 보편성의 조화: 아렌트 사상의 가장 큰 특징

한나 아렌트 정치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자 궁극적인 매력은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고, 반대로 보편적인 논의를 끌어내면서도 구체적인 차원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아이히만의 사례처럼 인간 자체의 보편적인 문제를 바라보며, 나아가 공동의 사회를 세워나가는 보편적 관심으로 나아갑니다.

이 특성은 아렌트 사상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 특징이자 그녀의 철학적 태도를 정의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곤 합니다.[^9]

현상학적 접근(Phenomenological Approach): 아렌트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보편적 원리에서 시작하기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과 실제 정치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그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난간 없는 사유(Thinking without a Banister)': 한나 아렌트 자신이 자신의 사유 방식을 설명하며 사용한 표현입니다. 특히 아이히만 재판 이후 인간 정신 능력에 관한 탐구를 다룬 그녀의 유작 정신의 삶에서 이러한 사유의 태도가 강조됩니다.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 아렌트 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특징으로, 그녀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전체주의, 망명, 아이히만 재판 등)과 깊은 철학적 성찰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조건을 비롯한 그녀의 모든 저작과 정치 평론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이 드러납니다.

 

결론적으로, 아렌트의 이러한 사유 방식은 특정 용어로 단순화되기보다는 그녀의 전체적인 철학적 방법론이자 태도로 이해됩니다. 그녀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나 개인의 경험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과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 통찰을 다시 현실에 적용하여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묘한 방향 설정, 정교한 설득적 장치의 구성, 그리고 단순한 이론가를 넘어 몸소 체험한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사상 속에 녹여내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한나 아렌트라는 사상가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깊은 유혹을 느끼게 합니다. 그녀는 사유와 행동, 이론과 경험이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의 삶과 글로 보여준 진정한 정치 사상가였습니다.

 

 

의제: 현실 진단과 희망의 가능성

오늘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통해 우리 시대의 깊은 문제들을 고민하고, '탄생성'의 힘을 믿으며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1.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최근 한국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라는 섬뜩한 진단을 받은 바 있지만, 한편으론 뒤늦은 감도 없지 않습니다. 온라인 집단 사냥, 클리셰(cliché) 이상의 사유가 불가능한 정치인들의 말, 그리고 계엄사태에서 드러난 사고를 거부하는 관료집단들까지, 사회 전반에 스며든 비정상의 정상화는 이미 상당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총체적 '퇴화의 조건' 속에서 아이히만 들은 여기저기 등장하는 나머지 그들이 더는 예외적인 인물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말한 필연적 과정(necessity)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understanding)할 수 있을까요. 이에 관한 논의가 시급해 보입니다.

무사유(thoughtlessness)의 짙은 안개에 잠겨있는 이 '어두운 시대(dark times)'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렌트가 말한 '테러와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국가권력의 직접적 억압이 아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무언의 압력으로 작동하며, ‘7세 고시의대 쏠림 현상’, 그리고출산율 감소같은 자멸적 선택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입니다. 보편과 특수 사이의 그 구체적 개별적 상황 속에서의 판단(judgment)을 위해 필요한 '인간 정신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공부와도 직결된 오래된 물음이 아닐까 합니다.

2. 인간의 조건은 여전히 작동 가능한가?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적 삶'의 복권을 외치던 아렌트가 말년에 정신의 삶으로 돌아간 것은 사상의 발전일까요, 아니면 '무사유'에 대한 패배감의 귀로였을까요? 물론 그녀는 대답할 수 없지만, 아렌트가 제시한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제기해 볼까 합니다.

인간의 조건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957년 인간이 만든 지구 태생의 한 물체가 우주로 발사됐다." 몇 년 전, 이 매력적인 문장을 만났던 때의 감동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만 그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요. 스페이스X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나 AI와의 융합을 통한 기계 인간으로의 진화 등이 거침없이 달려드는 지금, 아렌트가 전제했던 '인간의 조건' 그 자체가 이미 유효하지 않은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그만 그 첫 감동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진화는 우주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진화가 곧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인간은 어떻게든 변화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가 인간들이 진정 원하는 방향인 것인지, 아니면 죽음의 공포에 내몰린 무사고의 결과인지에 대한 논의조차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구에 대한 설득의 공간을 고민하기보다는, 지구라는 제약을 탈주하는 것이 똑똑한 길이라는 이 기만의 시대는 이미 어떤 임계점을 지나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더는 기존의 조건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모두가 불안에 시달리던 그 사이에 무언가 놓친 것은 없는지, 진정 바라는 것은 말 해 졌는지를, 함께 말하고 행위할,‘설득력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가 절실합니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확실성이 멈추는 곳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안다는 것은 곧 불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유가 시작되는 그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기를, 우리의 근본적인 탄생성이 작동하는 그 시작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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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한나 아렌트의 '판단' 개념에 관한 후학 연구: 아렌트의 미완성된 '판단' 개념은 현대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로날드 베이너(Ronald Beiner)**한나 아렌트와 판단의 문제(Hannah Arendt and the Problem of Judgment)**리차드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의 아이히만과 판단에 대한 성찰(The Banality of Evil: Hannah Arendt's Eichmann in Jerusalem and the Problem of Judgment) 등이 아렌트의 판단 이론의 중요성과 그 함의를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이 외에도 아렌트 연구자들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의 연관성 속에서 아렌트의 판단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2]: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한나 아렌트: 사랑의 삶과 정치의 사유(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Love and Saint Augustine) (조안나 스코트와 주디스 스타크 편집 및 해설); 아렌트의 유대인 관련 활동 및 생애 연구 논문들에서 야스퍼스의 '세계 관찰자' 시각이 시온주의 비판과 이스라엘 정책 분석에 미친 영향이 해석됩니다.

[^3]: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이 책에서 아렌트는 테러의 본질과 그것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4]: 세일라 벤하빕(Seyla Benhabib)의 아렌트 연구서 및 논문 등 여성주의 관점에서 아렌트 철학을 재해석한 학술 자료들을 참고하여, 아렌트 개념이 여성주의 철학의 길을 발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이 언급됩니다.

[^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전반의 '사회적인 것''행위' 개념,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학술적 해석 및 확장.

[^6]: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참조. 아이히만의 발언 및 이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7]: 현대 숙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아렌트의 '행위' 개념과 정치적 소통에 대한 통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관련 학술 연구 및 서적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됩니다. (: 유르겐 하버마스 등).

[^8]: 아렌트 사상의 주요 2차 연구서 및 학술 자료 (: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전기, 다양한 학술 논문)에서 아렌트의 구체성과 보편성의 조화, 현상학적 접근, '난간 없는 사유',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 등 그녀의 독특한 사유 방식이 설명됩니다.

[^9]: 아렌트 사유의 방법론적 특징:

현상학적 접근 (Phenomenological Approach): 아렌트의 사유 방식은 스승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현상학적 태도를 지닙니다. 이는 추상적 이론보다 구체적 경험과 현상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아렌트의 방법론적 특징으로, 그녀의 주요 저작 전반에서 나타납니다. (참고: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한나 아렌트: 사랑의 삶과 정치의 사유등 아렌트 관련 주요 2차 연구서)

'난간 없는 사유(Thinking without a Banister)': 한나 아렌트 자신이 자신의 사유 방식을 설명하며 사용한 표현입니다. 특히 아이히만 재판 이후 인간 정신 능력에 관한 탐구를 다룬 그녀의 유작 정신의 삶에서 이러한 사유의 태도가 강조됩니다.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 아렌트 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특징으로, 그녀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전체주의, 망명, 아이히만 재판 등)과 깊은 철학적 성찰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조건을 비롯한 그녀의 모든 저작과 정치 평론에서 이러한 상호작용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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