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淡饭
장숙의 식사는 간소함[食淡饭]을 추구합니다. 간소함을 추구하는 변명(?)을 이번 속속에서 배운 호네트의 인정이론과 엮어 풀어 보려고 합니다. 호네트는 ‘주고-받는’ 인정을 얘기했지만 인정은 정동에 맞물린 태도에 가까워 ‘비용 없이’ 임의로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호네트가 인정이라 부른 ‘어떤 태도’의 망각은 안정성이라는 불확정성의 실종에서 비롯합니다. 인간은 정신이 누층적으로 외화된 문화 덕에 고양이가 먹이를 사냥하듯 자신을 (숨)죽일 일이 없고, 잠자리처럼 짝찟기를 위해 목숨을 걸 일도 없으며, 토끼처럼 (천)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전력 질주할 일도 없고, 여타 동물처럼 먹이와 짝짓기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치킨 게임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의 빈곤을 부른다’는 말은 ‘공대할 타자’의 부재에서 비롯한 ‘안정성의 역설’을 드러냅니다. 호네트가 인정 망각이라 부른 것은 공대할 타자의 부재에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미 사회문화적 여건에 놓인 인간의 정서와 태도가 동물과 같이 일차원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욕의 계보’를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정동은 말과 엮여 시공간을 초월해 타자성을 통합할 수 있는 '하아얀'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경은 기원을 잊는다’는 것이 꼭 단점만은 아닌 셈입니다. 다만, 인정의 뿌리는 동물적 정동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외부에 서게 되고 이로써 우회가 가능해집니다. 인정 망각을 되살리는 일은 ‘태도의 변화’에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공부의 기본기로서 태도를 먼저 말씀하셨듯 타자와 응하기로서 요구되는 정서와 맞물린 태도가 ‘공대’입니다. 물질적 풍요라는 안정성이 부른 공대할 타자의 실종이 ‘지금 여기’라는 외부와 응하기 위한 태도로서 ‘수동적 긴장’에 쏟던 에너지를 내부로 변침하게 만듭니다. 타자와 응하기에 사용되던 에너지가 내부로 스며들어 에고를 살찌우게 됩니다.
그렇기에 태도의 변침 없이 타자에 대한 인정은 불가합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인정은 정서적 차원을 물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정을 이성적으로 주고받지 못하기에 ‘인정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태도를 변침하는 방향으로 우회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도 또한 바꾸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인문은 매개학이자 매체학이자 우회학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끄-을-고’ 공대할 타자들이 우글거리는 사바나로 나가지 않으면 응하기에 요구되는 ‘수동적 긴장’은 공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예열 없고 후유증 없는 공부, 수동적 긴장, 집중, 차림세 없는 차림세, 정중동동중정(靜中動動中靜), 성성적적(惺惺寂寂), 재이부재(在而不在), 무사적 삶, 신독(愼獨) 등속을 선생님께 배웠고, 공자도 ‘군자는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君子食無求飽 居求無安)’고 하였으며, 윌러스틴도 '반체제 운동의 동원국면'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개념들은 모두 물질적 풍요 속에 잃(잊)어버린 공대의 정신을 되찾는 길과 이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공대할 타자와 함께하는 식사의 간소화는 태도의 변화를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