品粗茶 食淡饭(11), 192회 속속

by 독하 posted Oct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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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인간의 숙명


이번 장숙의 식탁을 사진에 담지 못해 기억을 상기할 매개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를 변명삼아 이번 속속에 두루 엮인 ‘기억’을 매개로 글을 남기는 것으로 식탁 풍경을 대신합니다. ‘기억은 감정이고, 감정이 기억이다’(박문호)라고 말합니다. 감정의 발흥은 공대할 타자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으니 기억은 ‘공대할 타자’와 엮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기억이 노년기의 기억보다 풍부한 사유도 이에서 연원합니다. 정신이 자라는 공부가 공대라는 정서이자 태도이자 노동을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인문(인간의 무늬)의 공부에 공대할 타자와 어울리는 공부가 요구되어지는 것은 어울림 속에 ‘빛나는 순간’(k 선생님)을 맞이함으로써 새로운 기억이 정신적 차원에 ‘기록’(k 선생님)될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아닌 기억은 상기입니다. 상기는 정신적 차원의 기록을 몸의 형식으로서 접근하는 일입니다. 상기를 매개하는 몸이라는 형식은 정신의 조각인 정서(감정/은유)와 언어(상징/개념 호출)로 나뉩니다. 바꿔 말하면, 정서와 언어라는 패턴에 이미지의 패턴이 중첩돼 얽힙니다. 트라우마와 같은 외상은 언어라는 색인화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기억으로서 정동이라는 매개를 거쳐 ‘은유적’ 상기로서 찾아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동을 다른 말로하면 몸의 변화인데 몸이 항상성을 지니기 때문에 동일한 정동은 일관된 패턴을 지녀 겹침을 이루게 되고, 그 동일성을 기반으로 색인의 역할을 도맡게 됩니다. 물론, 정동은 몸의 변화에서 비롯한 패턴이므로 그 수가 언어에 비겨 빈약해 동물성이라는 접근과 회피에 수렴되는 성긴 색인이 될 수 밖에 없고, 또한 몸의 변화를 요구하므로 수동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정동이라는 몸의 변화가 부지중에 상기의 매개로서 작동하는 셈입니다.

경험은 대별하면 두 가지 패턴의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외부 자극을 분별하는 이미지의 패턴이 하나이고, 외부 자극이 부른 내부(몸)의 변화가 또 다른 하나입니다. 표상과 정동입니다. 반복되는 표상과 정동을 하나의 패턴으로 묶어 자극과 반응 사이의 물질이라는 배타성(시간성)을 배제시키는 정신적 존재의 방향성을 ‘해석에서 초월’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물이 지닌 초월성은 생존을 위한 즉각적 반응을 위해 비롯합니다. 애증과 호오에 말이 개입하지 못하는 이치가 기억이 시간성이라는 물질성을 우회하는 정신적 차원의 개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출현하기 전에 작동하던 상기의 수동성은 꿈에 그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면중에는 감각(영역)과 전전두엽이 비활성화되기 때문에 꿈은 언어라는 절차성이 출현하기 전 상기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매체가 됩니다. 안전성이 동반된 수면 상태에서 정동이 불러낸 이미지의 상기는 생존을 위한 일종의 모의 훈련으로서 강박적 성격을 지닙니다.

기억과 상기는 한편, 몸이라는 형식을 이룹니다. 몸의 형식이 정신적 차원의 연결 고리를 이루니 당연지사입니다. 계통발생적(게놈)으로서 코드화된 기억이 하나의 형식을 차지하고, 개체발생적(신경망)으로서 가소성을 지닌 기억이 나머지 하나의 형식을 이룹니다. 일차적으로 게놈에 의해 몸이 다르게 표현되고 언어성이 신경망을 드다루면서 인간의 개별성을 구성합니다. 인간이 말을 얻기 전에는 코드화라는 계통발생적 기억에 의한 몸의 형식을 지녔기에 몸의 차이는 코드화된 유전체가 외부 조건에 따라 발현되는 여부로 제한돼 그 종적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이루는 경험은 감각 기관을 거쳐 동시 유입된 외부 자극이 이미지로 번역된 패턴이기에 물질의 패턴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 유입에 의해 구성된 패턴 사이에 절차성을 부여할 색인과 아교로서 매개가 부재해 파편화된 채 남게 됩니다. 경험의 순간에는 말이 개입하더라도 그때의 말은 기의가 아닌 기표로서 패턴의 조각을 구성합니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는 경험의 반복은 이미지로서 정동이라는 몸의 변화와 맞물려 해석을 거쳐 초월로서 정신적 차원에 중첩돼 얽히게 됩니다.

말이 일종의 해석으로서 사후성을 띤다는 말은 경험의 메커니즘 속에는 말이 기의로서 작동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경험 기억의 구성에는 외부 자극의 동시 유입이라는 동시성 외에는 별다른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입니다. 좌뇌와 우뇌의 통합은 말로서 이루어지지만 말은 사후적이고 작위적이기에 그 내용적 차원의 검증이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좌뇌의 작동 방식이 우뇌와 다른 것은 아닙니다. 뇌의 작동 방식은 하나입니다. 언어라는 감각질도 청각 감각질의 일부이기에 동시 유입에 의해 패턴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문법도 패턴의 귀납에 의해 구성됩니다. 앞말과 뒷말의 반복된 유입에 의해 패턴으로서 문법이라는 성좌가 돋을새김됩니다. 다만, 성좌가 별은 아니듯 언어의 패턴은 물질의 패턴에서 연원하지 않아 경험의 외부로서 임의성을 띠며 가소성을 지닙니다. 초월과 해석의 차이는 말의 개입에 의해 갈리지만 엄밀히 구분하면 절차성의 개입에 의해 갈리게 되므로 언어성 속에는 초월(기표)과 해석(기의)이 공존합니다.

개별성이 언어성에서 비롯한다는 말은 언어의 물질적 무의미성에서 연원합니다. 언어는 외부 세계를 반영하지 않기에 시공간을 초월할 가능성을 지닙니다. 반복된 동시 유입에 의한 패턴의 구성은 말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 유입을 통해 물질의 패턴에 덧입혀 색인과 아교로서의 역할이 가능해지면서 물질에서 비롯한 감각질을 드다루며 물질의 패턴을 초월한 새로운 패턴의 창발이 가능해집니다. 언어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에 진리라 부를만한 고정된 패턴이 부재할 수밖에 없는 사유도 언어성이라는 무의미성의 개입에서 비롯합니다. 인간의 개별성은 언어성이 개입하며 ‘개념 호출’을 매개로 경험을 재구성/재서술할 수 있게 되면서 갈라지게 됩니다. ‘어디로 이동하여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언어성을 매개해 달라지게 됩니다. ‘지금 여기’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꿈과 다르게 정동을 넘어 언어성의 개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타자의 기억으로 남길 것인가’, 인간이라는 정신적 존재가 지닌 숙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