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회 속속 복습 문장 모음

by 독하 posted Apr 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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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인
"나는 이 집을 짓고 있는가, 허물고 있는가?
나는 동학에게 신뢰를 얻고 있는가?
나는 자득이 있는가?"

돌이켜 볼 때 내 인생에 한 전환을 가져온 것이 장숙 입문이다. 정말 잘 한 결정이었다. 장숙이 오래오래 갈 수 있도록 이 물음을 가슴에 꼭 품고 살피고 또 살펴야겠다.

孟子 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勿忘 勿助長'이 새삼 다가온다.

2. 유ㅅ진
공부하는 사람은 작은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문장 속의 단어가 문맥에 따라 뉘앙스의 차이를 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공부다. 새로운 단어를 암기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쓰면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알아챌 여력이 없어진다. 번잡한 생활 속에서는 작은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差不多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규칙적이고 담담한 생활을 통해 남들에게는 무시될 수 있는 작은 차이가 나에게 다가 올 수 있게 해야 한다. 차분하고 평범한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잡힌 작은 변화는 창의성으로 이어지고 1000권의 책을 써 낼 수 있는 위대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부는 이 지루하고 균일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지켜나갈 실력을 키우는 것이라 하겠다.

3. 연이정
① “감히 심심함 따위가 나의 생활을 침범하지 못하게 할 것“(단보선생)

단중 훈련, 적경, 경행, 산책, 낭독 등, 일상생활 속에서 규칙적인 실천을 통해 몸과 마음의 중심이 낮아지면 단단해진 마음자리에 감히 심심함, 외로움, 우울함 따위는 내 생활을 침범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낮음 속의 평안과 창의성은 반복되는 일상을 기쁘게 살 수 있는 힘이 된다.

➁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까지 배워야 할까, 끝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의 질문에 단보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배움은 원래 아이들의 일이며 배운다는 것은 아이 같은 가능성을 산다는 이야기라고 말씀해 주셨다. 최적 적응일 뿐이라면 계속 배울 필요 없겠지만 길게 공부 하는 이유는 어떤 가능성가운데 자신을 계속 두고자 함임을 이야기해 주셨다. ‘배움’이라는 막연함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➂ ‘옆-방’ 은 희망과 절망이 함께 있는 메타포 (단보선생)

‘방’은 절망이지만 ‘옆’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희망이라고 말씀하셨다. 보이지 않는 것 즉 아직 모른다는 것은 가능성이자 희망이다. ‘옆방에 가 봤다는 건 공부한다는 것’(단보선생) 그것은 배운다는 것이고 어떤 가능성 가운데 자신을 두는 일이다.

4. 김ㅅ연
단보선생은 사람이 현명해지면 싸움과 분쟁을 피해고 화해하는 것을 일의 기본적인 방식으로 삼게 되는데
이것은 말의 category를 잘 잡아야한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성격이 꽤 무난한 편이고 저와 드물게 척을 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빌런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관계의 파국을 타인의 괴팍함으로 간단히 정리하고 지나왔는데 이 말씀을 들으니
이것은 타인의 성격적 결함이라기 보다는 서로가 어떤 사안에 말의 category를 잘못 잡은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하고 타인이 물어보면 잘 응해서 category에서 벗어나지 않은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늘 조심조심조심 신중신중신중해야겠습니다.

5. 임ㅁ애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 정서는 '옅은 슬픔'이 아니겠나"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서 위안을 얻는다. 감출만 한 매발톱이 돋기는 할는지 기대하기도 막막한 실력이지만, 나의 기본 정서를 만인의 증상인 우울로 정의하기엔 왠지 억울했다. 이 "색조가 옅은 슬픔"은 명랑함과 다르지 않다고 하셨다. 옅은 슬픔의 정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명랑함을 수시로 불러낼 수 있는 '실력'과 같은 말이 아닐까 싶다. 실력은 역시 생활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선생님은 "내 생활이 담담하기 때문에 내게 잡히는 게 많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슬픈 것들이 "넘어가지지 않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생활인 것이다. 소비나 과시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번잡하고 현란한 삶의 정서가 무슨 수로, 옅어서 아름다운 슬픔일 수 있을까. 알면 알수록 여전히 다 알 수 없다는 슬픔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너무 깊어지지 않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슬픔의 누림 속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명랑함으로 출력할 수 있도록 나는 기꺼이 '옆방'을 향한 공부의 길 위에 있다. 선생님은 "옆 방에 가 봤다는 것이 바로 공부"라고도 하셨는데, 숙인으로서 내가 받는 질문들이 내게 슬픔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때로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은 것을 굳이 묻는다. 옆방에 갈 생각이 없거나 갈 필요가 없거나 또는 다른 말을 하기 위해, 내게는 슬픈 질문들을 편하게 하곤 한다. ‘뭐하러 굳이 옆방에 가려느냐’는 걱정 어린 질문이 진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동시에 진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의 질문이 내게 슬픈 것은, 내가 아직 모르기 때문이고 나 역시 그 질문을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명랑하게 응할 수 있을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른다는 것을 더욱 선명히 아는 사람, 아직 가지 않은 방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슬픔에 감사할 수 있고 진심으로 명랑할 수 있다.

6. 단빈
"유방과 유비 그리고 마오쩌둥이 권력을 욕망하는 자였다면 장량, 제갈량, 주은래는 그 너머를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세 책사는 인문학 공부를 바탕으로 일차원적 경험론자라기보다는 메타인지와 Mapping 능력이 가능하였습니다. 뒤에서 돕는 자가 권력을 욕망하였다면 그런 욕망은 그들의 꾀나 지모를 뒤덮어 버렸을 것입니다."

장량이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천하를 아우르는 겹눈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다면 '제왕의 스승'은커녕 무사한 삶마저 멀리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욕망을 비워낸 자리에 들어선 장량의 지모와 계책으로 유방은 천하를 얻고 장량은 지금까지 謨聖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7. 조ㅇ남
단보선생은 지린의 복습글에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아라.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의 현명함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와의 대결 속에서 세워지는 원칙과 원리이기에 참으로 어렵다. 그 시늉만으로도 공덕이 쌓인다.”
그리고 또,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와 곁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늉만 해도 공덕이 쌓인다’는 말은 결국 태도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미래의 나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면, 지금을 함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장숙의 동학들이나 단보선생의 모습을 따라, 연극적으로 실천해 보려는 마음이 내 미래 모습의 조각을 이룰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나’일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 그 모든 것은 오롯이 나의 몫입니다. 내 미래는 오늘의 작은 생활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여러 형식과 방법에 대한 조언이 내 생활과 맞지 않을 때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계획이 번번이 어그러져, 한동안은 시간표를 짜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간을 정하고, 그 안에서 나를 움직여 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더 바빠졌음에도 생활은 점점 단순해지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감정의 흔들림도 줄어들어 사소한 다툼도 없어졌습니다. 이 생활이 오래 이어져, 자연스럽게 내 몸에 스며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단순하고 정돈된 몸과 마음이 지금의 나를 넘어가는 경험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8. 는길
어떤 물음이나 개념이 몸에 붙지 않고 미끄러지는 때가 있습니다. <자기구제의 공부>가 벌어지는 경기장을 저 아래의 <물 밑>으로 비유하였는데, 경기장으로 하강하지 못한 채 둥둥 떠서 부유(浮游)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공부의 불쾌라고 할까요.
〈미래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그렇게 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속속에서는 ‘분명한 차이’로 감각되는 아주 작은 마주침이 일어났습니다.
앎이 서서히 ‘다가온다’라는 것을 체험하며, 조금 더 정신을 믿게 됩니다.

9. 숙비랑
-‘영원한 자기소개’중에 단보선생은 “三人寄れば文殊の知恵”라는 일본 속담을 소개하셨다. 이 말은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생긴다는 말인데, 여러 사람이 협동/협력하였기에 만들어진 지혜가 크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모였을 때 생성되는 앎의 전통 중 또 다른 하나로, 유교적 수행성을 띈 ‘三人行必有我師焉’이 있기도 하다. 이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 자기 스승이 될 만한 이가 있다는 ’공자’의 말로, (모두 알다시피)함께 한 이들을 살펴 그 중 반면교사(反面教師)하거나 타산지석(他山之石)삼아 자기를 갈고 닦으라는 말이다. 여럿이 모여 만든 지혜로써 외계에 대응하여 위기를 극복한다는 전자의 말과 달리, 길 위에서 생성되는 위기 속에 어떤 관계를 통한 배움/앎으로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관건인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여럿이 어울리기에 가능한 지혜로 “우리(장숙인 학인)가 세 명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생긴다”는 새로운 말을 배웠다. 이 말은 생긴 외형이 일본의 속담과 닮았고, ’타자를 매개‘로한다는 점에서 그 속 뜻이 공자의 말과 닮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의 두 격언과 이 새로 배운 말의 간극이 크다. 왜냐하면 이 말 속 ‘지혜‘가, ‘타자로부터 촉발된 계시에 의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장숙 공부의 윤리 중 하나로 삼중무지(三中無知)가 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는 윤리는 배운바, 인식론적 차원을 넘은 더 큰 앎에 대한 하-아-얀 의욕의 윤리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앎이 ”조각나“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수반된 존재론적 겸허의 윤리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배운바, ”내가 나를 죽이기 때문에 쓸모 있는 윤리(단보 선생)“로 도대체 알면서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알기도 한 ”나 보다 큰 나”를 향한 지혜를 잉태시키는 윤리이기도 하다. 이 삼중무지의 형식 속에 나를 계시하여 알게 하는 혹은 그렇기에 상호구제를 계시하는 타자는 어떤 지혜로서 다가오는가. ’같은 거 없이(同無)‘ ‘어울려’ ‘공부’하기에 생성된 지혜는 어떤 미래를 창발하는가. 공부의 현장에서 만난 타자의 존재가 더욱이 귀해진다.

10. 박ㅇ름
규칙적인 생활에서 창의성이 발현된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생활이 별나면 작은 변화를 캐치하지 못한다."라고 하셨던 단보선생의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더하여 일상이 아무것도 없으면 작은 변화가 창의성으로 갈 수 있고, 공부하는 사람은 약간 호수같이 담담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규칙적인 생활을 만들고 그것을 잘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머무르는 장소가 청결하고 어수선한 것이 없는 상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크고 무거운 가구를 내보냈을 때 마음속 묵직함이 사라지고 어떤 의욕이 생겨났던 최근의 경험을 통해 저는 물건이 저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요즘 두고두고 떠올리고 있습니다. "내 생활이 담담하여 내게는 잡히는 게 많다. 남들이 무시하는 게 나는 무시가 안 돼요."라는 단보선생의 말씀에 따라 담담한 생활을 꾸려보고자 한다면 나의 장소와 나의 생활 모두를 담담함과 어울리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살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11. 권ㄷ환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학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산길에 아무 데에 발을 디디면 안 되듯, 대화의 장 또한 안일한 태도가 아니라 역시 수동적 긴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말을 무작정 다른 말에 붙이면 안 된다고, 말을 말이 되는 곳에 그리고 붙을 만한 곳에 붙여야 한다는 단보선생의 말씀은 어찌 붙이면 좋을지조차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해야 하는 말을 모르겠으면 최소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차선이자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침묵은 자신의 에고를 묶는 수행의 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또한 타인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공동의 노동을 실현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나아가, 때로 실력이 부족한 학인이 가지면 좋을 윤리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화의 차원을 잘 파악하면(상당한 공부와 메타인지 능력이 요구되지만) 그것으로도 말을 많이 안 하게 된다"는 단보선생의 말씀은,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하다. 일상에서 매 순간 무수히 생성되는 말은 빈번히 다른 차원에서 서로 주고받고 있다. (만약 이를 잘 파악하면)그 만만치 않은 어긋남을 누가 감히 쉽게 풀어내고 중을 칠 수 있을 거라 자신할까? 그 자신과 판단이 없다면 어떻게 쉽게 말을 잇고 어떻게 가볍게 말을 정리하겠다고 나설까. 말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법이라 배웠는데, 그 꼬인 매듭을 풀어낼 자신도 없이 어떤 낯짝으로 침묵을 깨고 입을 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침묵이 하나의 묶음이 아니라 상식이자 윤리로 다가온다. 대화의 차원을 잘 파악하면 말수가 줄어든다는 말은, 말의 실패를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는 행위에서의 에고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말을 듣고 공기를 읽고 전체의 조화를 살피지 못하는 인식에서의 에고 문제를 고려하게 만든다. 역시나 말은 정말 한 사람의 실력을 아주 잘 드러나게 한다는 점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공부를 지속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보통 일이 아닌 말과 대화를 잘해 나가기 위해선 무엇을 읽고 어떻게 듣고 어떤 태도로 쓰고 무슨 마음으로 말할지, 다시 또 새로이 배움을 시작해야겠다.

12. 아무공
학인으로서 최고의 미덕은 실력이나, 실력이 쌓이면 발톱을 드러내고 싶고 아무나 찌르게 된다. 실력을 감추고 주위에 덕을 입히려면 자기 존재가 변화해야 하고 넓어진 존재의 품에 실력을 담아야한다.(能ある鷹は爪を隠す。)
시스템에 얹히지 말고 한 발 한 발 현명하게 걷도록 애를 써라, 그렇게 걸어야 자기 실력이 생기고 권위가 생긴다. 실력이 있다하더라도 다 모르기 때문에 오는 슬픔이 있고, 거기에는 뒷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보인다.

13. 여일
① 단보선생이 직접 고안한 몸수련법으로 5術이 있다. 주천, 단중, 복기, 추변술, 우보가 있는데 이 중에 주천과 복기는 실효가 있으니 매일 정성껏 하기를 신신당부하셨다.

➁ '세 명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는 논어에 나오는 말을, '세 명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로 재밌게 표현하셨다. 문수보살의 지혜는 타인들을 통해 얻는 계시와 같다고 설명하셨다.
이런 면에서 지혜는 순수한 나만의 것이 없으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은 복수성 속에서야 새로운 탄생과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아렌트의 말과 연결된다.

➂ <중국과 중국어> 시간에 발제자는 「차부뚜어 선생전」을 읽고 설명해주었다.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저자가 전근대의 만연한 대충주의를 풍자한 짧은 소설이다. 대충주의 문화의 배경에는 다민족과 많은 인구수에 따른 갈등을 원만히 넘어가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설명한다. 대충주의는 전근대적인 낡은 문화로 치부되지만,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공존을 위한 완충장치 역할도 하는 게 흥미롭다. 중국에서 다년간 살았던 발제자는 사람들의 낙천적이고 착한 심성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발제 준비를 위해 중국 출장(?)까지 다녀오는 그녀는, 처음 장숙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어 발에 깁스를 하고 속속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과연 단보선생의 말씀처럼 '철鐵의 여인'답다. 보통 철의 속성은 단단하고 냉철한 이미지인데, 철은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더 강하게 단련된다. 철의 여인은 용암과 같은 뜨거움도 내면에 품고 있다.

➃ 성숙한 사람의 마지막 정서는 "옅은 슬픔"과 같은 정서가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옅은 슬픔의 기원이 무엇일까? 삶의 유한성, 무상함, 연민, 미안함, 고마움 등등.

14. 지린
"중국과 중국어" 시간에 유ㅅ진씨가 중국 땅에 있다는 심천시(深汌市)를 다녀온 소감을 말해주었다.
신천은 IT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했는데,
ㅅ진씨가 가보니, 거리의 차들 중 70%가 전기차였으며,
그 차들 대부분이 중국자국 브랜드의 고급차였고,
드론으로 스타벅스나 맥도날드가 3분으로 배달되고 있었으며,
택시들은 100%가 전기차이고 무인택시였다, 한다.
자전거는 거의 없고, 스마트 안경이 이미 있었는데,
유ㅅ진씨가 덧붙이기를 이렇게 변했는데도 중국사람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교재 『제왕의 스승』장량을 읽어나가면서,
그 시간과 대륙의 크기와 깊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교적 최근에 만든 EBS다큐를 몇 편 보았다.
중국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을 기리는 사당과 동상과 이야기가 있는 땅의,
거리와 집과 사람들의 풍경을 눈여겨보았다.
거리는 깨끗하고 유적지들은 크고 잘 보전되어 있었으나,
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활환경은 현대적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옛사람들이었다.

속속 강의 중에 나는,
"모방을 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학자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나는 깜짝 놀랄 때가 많은데,
변하지 않아도 괜찮은 중국사람들에 대한 소감과 인상기를 떠올리며,
어느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역사적 산물의 정점일 거라고 여겨졌다.

15. 독하
"한물간 검객이지만 칼은 매일 갈지요."(단보선생) 

칼을 가는 일을 소홀했더니 옛버릇이 잼처 솟는다. 잠복해 있던 습기는 형식의 흘게가 느슨해진 틈을 타고 기어코 머리를 디민다. 초심을 잃었다느니, 마음을 다잡겠다느니 말할 필요가 없다. 공부는 형식 속에 있다. 공부의 소홀함이 형식의 느슨함과 별개가 아니다.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공부가 되는 일은 형식의 유지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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