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속 210회 단상> 존재론적 겸허: 새로운 공동체의 기반

by 독하 posted Sep 0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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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단보선생)

이번 '속속'의 저녁 식사는 외식이었다. 실내화가 밀어붙인 외식 문화의 일상화는 식탁을 매개로 형성되었던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명징한 지표다. 과학 문명이 이끈 실내화는 '미지'라는 외부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점진적으로 통제하며 온실이라는 예측 가능성으로 수렴시키는 과정이었다. 자본과 과학 기술이 구축한 온실 속에서 각자의 자폐적 거울상만을 품은 채 개별화된 소비 욕망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지라는 위험 요소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출현했던 공동체성은 이미 상실된 지 오래다. 그러나 실내화가 고도로 진행되면서 이른바 '안정성의 역설'이 작동하며 문명은 새로운 위험을 창출하기 시작한다. 일찍이 울리히 벡은 문명이 스스로 부른 통제할 수 없는 '위험 사회'를 말했고, 전통적 규범의 상실이 가져온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위험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위험의 개인화'를 경고했다. 작금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하는 위험은 바로 문명(밈)과 개별성의 되먹임 구조에서 비롯한다. 실내화는 공동의 노동을 거쳐 외부의 위험 요소였던 미지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안정성이 부른 역설은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망각한 개별화된 개체들을 양산하며 '타자성'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새로운 위험 요소를 창발시키고 말았다. 파편화된 개별성에서 비롯한 타자성은 위험 요소로 둔갑한 '새로운 미지'다. 트럼프라는 개(별)성이 미국이라는 자본과 기술의 집합체를 만났을 때 도래한 세계적 위험의 역동성은 이를 극명하게 방증한다.

개체와 개체를 연결하는 공동체의 기반은 미지라는 위험 요소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형식'과 이를 매개하는 '언어'에서 연원한다. 공동의 언어와 의례가 몸의 패턴으로서 유입되고 몸과 몸의 겹침을 매개로 '미지에 함께 응하던' 공동체성은 자본과 과학 기술이 미지를 잠식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실내화가 부른 물질적 풍요와 미지의 부재 속에서 가상화라는 무시간적 시공간을 매개로 개별화가 극단으로 치우친 소비의 시대가 바로 작금의 현실이다. 공동의 위험 요소가 사라진 환경에서 타자와 어울리기 위해 요구되는 에너지와 사회적 비용은 이미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치를 넘어섰다. 스마트폰을 위시한 전자 매체는 가상화를 매개로 개별성을 촉매하는 동시에 가장 정교한 '타자성 제거 장치'로 작동한다. 매끈한 스마트폰이 열어주는 가상 세계에는 몸과 몸의 부딪힘에서 비롯되는 타자성이 제거된 채 오직 정제된 이미지만이 감돈다. 마찰을 극단으로 줄인 '터치'라는 간소한 (행위 아닌) 행위만 이루어진 채 일상과 동떨어진 이미지만 소비하는 세계는 타자와 응하기 위한 '행위 지표'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정신적 유희에 가까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미지'를 부활시켜 새로운 공동체를 창발하는 매개로 삼아야 한다. 그 가능성은 실내화가 낳은 타자성을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 미지로서 경외하고 공대(恭待)하는 존재론적 변침에 있다.
과거의 공동체가 자연, 질병, 신(神)이라는 미지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모여든 의례적 모임이었다면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공동체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넘어 '공대할 타자'를 매개로 새로운 의례적 형식을 갖춤으로써 창발될 수 있다. 이는 곧 실내화가 낳은 '타자성'으로써 미지를 회복하는 일이 된다. 스마트폰 속 알고리즘으로 편집된 타자는 입맛에 맞게 조작 가능한 기호로 환원되어 타자성을 상실하지만 일상이라는 시공간을 공유하는 '몸'을 지닌 타자는 결코 나의 역사성으로는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차가운 실재'로서 다가온다. 이 알 수 없음, 즉 '의도를 벗어난 타인의 존재'로부터 도피하여 가상 세계 속으로 숨어들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인간이 미지 앞에 스스로를 낮추었듯 타자성을 경외의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존재론적 변침을 요구한다. 타자라는 자신의 외부와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자폐적 에고가 깨어지고 몸과 몸이 만나 마찰하며 변화하는 '창발의 지점'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은 실내화의 역설로 자라난 타자성을 새로운 미지로 전환하고 그 타자의 몸과 마찰하며 자신의 몸으로 통합해 내는 '응하기'를 회복하는 일에 달려 있다.

자본과 기술이 초래한 디지털 세계의 소비적 언어는 극단적 개별화를 촉매하며 문명화의 위험 요소를 증폭시킨다. 타자성에 대한 공포는 '응하기'의 매개인 공동의 형식으로서 전통이 부재함에 비롯한다. 공동의 형식으로서 의례가 부재한 경우 타자와 응하기 위해서는 몸을 부딪히며 서로를 조율하며 다듬어가는 '겨끔내기'라는 시간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가상화는 일상을 배제시켜 타자와 응하며 변화하는 '끌개로서의 몸'이 형성되지 못하게 막는다. 응하기 실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무력감은 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로의 고착을 부추긴다. 결국 온실 속의 인간은 '감각-운동'의 되먹임 속에서 몸을 재구성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거울상 속으로 수동적 도피를 반복하는 비생산적인 되먹임에 빠져들고 만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가상화라는 '사이비-사이버' 세계에서 욕망의 도구로 타자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을 멈추고 '몸을 지닌' 타자 앞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매체 정치가 요구된다. 손안의 매끈한 단말기를 잠시 거두고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차가운 실재'로서의 타자를 '몸을 끄-을-고' 마주하는 의도 밖으로의 '외출' 말이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라는 존재론적 겸허는 자본과 기술이 해체시킨 공동체의 폐허 위에서 타자성이라는 미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