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가 필요 없는 글이지만, 앞선 발제문과 독후감이 엮여 있기에 게시합니다. 프린트는 제가 일괄 준비하겠습니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을 신학적 은유나 추상적인 관념론으로 환원하는 길은 텍스트 표면에 실재하는 접촉과 마찰을 무감각하게 도외시하는 일이다. 오코너가 경계했던 관념적 해독의 위험을 넘어 그녀의 문학을 직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피부 위에서 인물들이 지닌 무늬(Manners)가 매체의 변화와 엮여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신체-매체학적 궤적'을 '감각'해야 한다. 오코너 문학에서 인물들이 고수하는 교양, 도덕적 우월성, 혹은 삶에 대한 가치관과 그 자부심은 결코 존재론적 선천성이나 선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 노동의 억센 마찰로부터 몸이 안전하게 면제되어 있다는 계급적 조건과 생존의 고통이 즉각적으로 침범하지 않는 안온한 '실내화'(k 선생님)의 완충성이 허용해 준 무늬다. 이 완공된 온실 속에서 그려진 무늬는 소설이라는 텍스트에서 마찰이 생략된 긴 모음 위주의 연착륙적 발성과 완곡어법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나 오코너는 이 온실 속 감각질의 조화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환경의 결을 잔혹하게 비틀어버린다. 자동차 전복 사고, 탈주범의 총구, 가파른 아파트 계단, 자궁 속에서 터져 나오는 무자비한 태동, 그리고 빼앗긴 나무 의족, 숲을 삼키는 불길, 추방자의 낯선 현전과 짓눌러오는 트랙터의 쇠붙이라는 매체적 충격은 인물이 안전하게 안주하던 관념적 수채화의 프레임을 단숨에 부수어 버린다. 흰 오간디 카라는 붉은 진흙과 핏자국으로 오염되고, 매끈하던 나무 의족과 석고상의 피부는 기괴하게 꺾여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안온하던 농장의 수평선은 불길이 뿜어내는 검은 연기와 핏빛 태양의 그늘 속으로 기형적으로 어그러진다. 시각적 장식의 일그러짐을 넘어, 텍스트 표면 위에 배치된 시각·촉각·공간 감각질의 매끈한 조화가 무너지고 기괴하게 재배치될 때, 독자와 인물은 자신의 역사성이 깃든 '마음의 길'(k 선생님)이 갈 곳을 잃는 '판단중지(epochē)'를 경험하게 된다.
오코너만의 독보적인 특이점은 행위 지표를 잃은 인물의 처지와 인물의 몸(성대, 혀, 입술, 호흡)이 겪는 음향학적·생체적 무너짐이 동시1)에 체감되도록 텍스트에 이를 공감각적으로 잘 녹아냈다는 점이다. 그로테스크한 시각적 이미지가 혼돈을 부르고 인물이 뱉어낸 파열음이 청각적 이미지로 동시 유입되어 소설을 읽는 독자는 관념론적(top-down) 전달이 아닌 공감각적(bottom-up) 전달2)을 받아 인물에 근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인물이 지닌 무늬가 무자비한 타자의 현전 앞에서 무용해질 때, 이를 읽어내는 독자의 긴 모음 발성은 바짝 죄어드는 후두와 토막 나는 호흡 속에서 함께 무너진다. 인물의 대사는 더이상 관념적 교양을 담아내지 못하고, 혀끝이 치경과 연구개를 강하게 짓밟아 튕겨 나오는 파열음과 단발성 비명으로 추락한다. 철자 변형을 통해 텍스트 피부 위에 각인된 이 파열음의 비명은 대화와 독서라는 언표 행위를 통해 인물과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평소 경멸하거나 타자화하던 거친 생체적 소리를 그대로 뱉어내게 만든다. 무늬가 무용해지며 타자와 맨몸의 마찰을 불러 거친 일차원적 발성으로 미끄러진다.
결국 무늬의 차이란 본질적인 고귀함이나 무지함의 격차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의해 매체학적으로 갈려 나온 역사적 산물임을 인물을 둘러싼 매체를 기형적으로 비틀면서 그 매체의 변화가 이끈 인물의 변화로써 그려낸다. 사고를 통해 붉은 진흙 바닥에 주저앉고, 성대를 쥐어짜며 타자와 똑같이 헐떡이는 비명을 질러대는 이 잔혹함이 부른 '낮은 자리'에서 인물과 독자는 비로소 '참회의 기회'를 얻는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참회를 매개하는 셈이다. 무늬를 유지하던 조건이 어그러지면서 소설 속 인물이 부정한 타자로서 부적응자, 추방자, 전쟁으로 죽음을 맞이한 자, 아이를 낳은 여성처럼, 미지라는 폭력 앞에 무력한 존재로 미끄러진다. 오코너의 소설에서 ‘은총(Grace)’이란 관념적 도덕성의 회복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이라 믿었던 무늬가 완벽히 무너지는 '신체-매체학적 자리'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격차가 사라짐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불이적 사건이다. 오코너 문학은 무늬의 무용이 이끈 '존재론적 겸허'3)(k 선생님)를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오만을 깨뜨리고 미지, 즉 은총의 실재를 맞이할 기회가 주어짐을 '문학적으로' 그렇기에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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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시성은 매우 중요한데 정신의 메커니즘(축중)으로 살피면, 동시 유입된 감각이 패턴으로서 묶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은 자극은 동시 유입이 되지 않아 의식적 노력이 개입하지 않으면 패턴으로서 묶이지 않는다.
2)오코너가 텍스트로 전달한 공감각 정보는 '혼돈'과 '공포'와 '불안'한 이미지로 그득한데 뇌과학적으로 무엇을 전달(기억)하기에 매우 유리한 감각들로 구성된 셈이다. 박문호 박사의 말을 인용하자면, '감정이 기억이고, 기억이 감정이다.' 감정에서도 불안과 공포는 당연 기억을 위한 매개로서 으뜸이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파열음(Plosives)도 한때 동물인 인간에게 자극으로서 원초적 불안을 부른다. 파열음은 자연계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포식자가 피식자의 뼈를 깎는 소리, 원초적 무기의 충돌음,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음향학적 주파수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일차원적인 욕은 전세계 공통적으로 파열음으로 구성된다. fight, feed, flee, fuck 이라는 원초적 행위는 으르렁 거리고, 뼈를 깎고, 헐떡이고, 타자의 살을 찢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쌍스럽다', '천박하다', '매너없다'라는 표현은 원초적 이미지의 닮음이 녹아든 평가다. 파열음을 글에서 계속 강조하여 다루는 이유도 파열음이 생의 기본이 되는 일차원적 행위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계급이 높을수록 일차원적 행위에 관념(말)이 녹아들며 '인간의 무늬(manners)'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창발된다.
3)오코너가 말한 은총과 공부는 존재론적 겸허를 기반으로 타자와 겹침을 이룬다는 불이적 관점에서 상통한다. 그럼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폭력적 은총은 그 겹침이 무늬라는 인간성의 상실을 매개하므로 일차원적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부는 무늬를 지닌 채로 타자와 메타적 겹침을 이룬다. 공부는 무늬라는 '마음의 길'을 도려내 최대 공약수를 향하는 길이 아니다. 시간성을 매개로 타자와 마찰을 완만하게 치르며 '마음의 길'을 점점이 통합하는 과정이다. 오코너가 말한 참회로서 은총은 '다시 시작하는 자리'가 될 수 있지만 '지혜로운 자리'는 될 수 없다. 지혜는 배우고 익히는 시간과 비용을 요구한다. 오코너의 소설이 참회의 여부와 무관하게 은총의 지점에서 끝나는 사유도 이런 조건과 한계에서 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