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室'' essay_1. 겸허함이 찾아드는 순간

by 허실 posted Oct 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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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室'' essay_

겸허함이 찾아드는 순간.

    

-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에 홀로 깨어 주방의 낮은 조명을 켜고 식탁의자에 앉아 책을 편다. 잠에 덜 깬 졸린 눈을 부빈 후 허전한 손을 한 번 바라보고, 아직 멍한 뇌를 한 번 생각하고, 향긋하게 그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는다. 째깍째깍 가는 시간이 아까워 책에 시선을 한 번 줬다가 이내 일어나 머그컵을 찾아들고는 어쩔 수 없는 끌림으로 커피를 내려 손에 든다. 다시 앉은 식탁의자는 이전보다 따뜻하고 낮은 조명에 그윽한 향기가 스며 이제 무언가 된 듯 싶다. 펼친 책을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언제나 그랬듯, 펼친 책의 활자를 만나기도 전에 상념들이 먼저 찾아와 온 신경을 그리로 몰아간다. 언젠가부터 베인 나쁜 습이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상념들이 불러들인 얼굴들은 언제나 늘 몽땅 무표정 하다. 그리고 그 무표정의 얼굴들에 덧씌우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어느새 그 공간에서 나를 빼내어 감정의 홍수 속에 몰아넣는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온갖 감정의 오물 속에 파묻힌다. 미워하고, 좋아하고, 질투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 자책하며, 너는 왜를 외친다. 시커먼 굴속에 갇혀, 감정의 웅덩이에서 나오려 그렇게 발악한다. 발악하는 줄도 모르고 발악한다. 그러다 무심코 뻣은 손에 닿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각한다. 아 나는 또 함정 같은 상념의 그늘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구나! 곧 이어 뒤따르는 비난. 너는 이 시간을 또 허투루 흘려보냈구나. 너는 또 그렇게도 어찌할 수 없었구나.

 

- 그런 순간들이 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몸뚱이를 송두리째 잡아채어 끌어올려 줄 그런 이 찾아드는 순간. 늘 하던대로(습관) 하던 육신을 잠시 내려놓고 정신을 그 에 집중한다. 겸허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라 내게 왔던 시간을 이번에는 다르게 맞이해 본다. 겸허하게. 살아지던 육신이라 그냥 살던 그 습의 고리를 끊고 공간을 다르게 맞이해 본다. 겸허하게. 삶에 둘레가 차분해지고 상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 마른 따뜻함을 간직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흘러가는 시간에 응하고 자리한 공간에 응한다. 겸허하게.... 온통 밖으로 향했던 시선들을 지금 여기의 내게로 돌려 그곳이 장소가 되는 순간을 모른체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가만히 머문다.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장소의 길을 만들고 책의 집으로 정신을 인도한다.

몸이 겸허해질 때 가져다주는 선물, 집중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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