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랑, 인간을 공부하며 느꼈던 소회
별강자 : 虛室
별강의 주제로 ‘지난 한 해의 공부’라는 주제를 받고, 지난 한 해의 공부를 뒤돌아 봅니다. 속속의 공부자리에서 1년 동안 만난 이론가들과 그들의 명제를 떠올려 봅니다. 질서정연하게 떠오르지 않는 배운 말들이 안타까웠습니다. 배운 이론을 내 생활의 자리에 착실히 배치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의문이 들었습니다. 관념의 세계를 내달리던 자아는 나름, 공부의 맥락 안에 자신을 배치해 둔 양 사고했지만, 여전히 공부와 일상생활이 겉돌아 벅차기만 한 생활의 편린들이 따라 붙습니다. 배운 말들을 내 몸과 생활에 착실히 내려 앉히지 못했다는 깨달음이 돌아옵니다.
속속의 공부 중, 지난 학기의 공부인 <성, 사랑, 인간>에 대한 공부가 유독 어려웠던 것을 잊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어려움이 아닌 ‘자신을 알고 싶지 않음’이라는 일종의 저항이라는 것을 알기에 완전히 직면하지 못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유난히 오래, 여성 학인에게 주는 여운 있는 ‘말’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케이트 밀렛는 <성의 정치학>에서
48p. 새 반란자들이 낡은 성의 정치의 관습적 어리석음을 단호하게 부인하지 않는 한,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성은 우리의 괴로움의 중심부에 깊숙이 박혀 있다고 쥬네는 경고하고 있으며, 우리의 억압체제 중에서 가장 유해한 이것을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성의 정치와 권력과 폭력의 병든 광란 상태의 바로 그 중심부까지 도달하지 않는 한, 해방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우리를 또다시 같은 최초의 혼란 상태에 내려놓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의 정치와 권력과 폭력의 병든 광란 상태는, 그 괴로움의 중심부로 들어가 지금의 성의 정치구조를 전복시켜 버려야만 해방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그 성의 해방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어오던 성역할을 부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성의 역할을 모방하여 충실히 따라가면 되는 것일까? 낡은 성의 정치학을 넘어 먼저 그곳에 ‘도달한’ 선배는 누가 있을까? 성의 해방이 가져다 준다는 그 자유는 어떤 감각으로 오는 것일까??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공부하되, 생활의 자리로 돌아갈 때면, 여지없이 한국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회귀하는 인이 박힌 몸을 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적인 문제에서 한 인간이 보이는 행위는 종종 그의 삶에서 그가 보이는 다른 형태의 반응을 원형적으로 축약해 보인다.”
이 명제를 처음 접했을 땐 어떤 충격과 함께 성적인 문제와 삶에서 보이는 다른 형태의 반응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리둥절 하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곧 능동과 수동, 주체와 객체 등 성역할이라는 대립구조가 떠오르면서, 삶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에 따른 자아의 배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드러나게 해주었습니다. 프로이트를 읽는 내내 불편했지만 읽을수록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그의 견해가 놀라웠습니다.
또 프로이트는 <문명속의 불만>에서
221p. 지적 퇴화가 여성의 이차적 본성이라는 주장에 유리한 한 가지 논거는 그들이 성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일찍부터 금지되는 가혹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고력이 성적인 면에서 억압될 뿐 아니라 여기서 파생한 또 다른 억제 -종교적인 면에서의 억제와 정치적인 면에서의 억압- 에도 영향을 받는 한, 그의 본래모습이 실제로 어떠한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슬펐습니다. 성생활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일찍이 금지당했기에 저하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고력(=지적 퇴화).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가는 진화의 도정에서 일찍이 개화開化를 ‘거세’ 당한 여성은 실제의 본모습을 자신조차 만나보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남성이 페니스를 거세당할 수 있다는 거세 불안을 겪으며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넘어갈 때, 여성은 이미 거세 당했기에 어떤 형상일지 조차 알 수 없는 어떤 ‘개화(페니스)’를 소리 없이 죽이며 자신의 운명을 비켜갑니다. 남성에 의해 반동적으로 태어난 여성이 아닌, 여성 스스가 자신을 개화시킬 때 만나게 되는 여성의 실체가 보여주는 속살이 못내 궁금해지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엔서니 기든슨은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성의 해방이라는 자유의 길'을 이렇게 말합니다.
269p. 비-억압적인 사회는, (…) 섹슈얼리티가 강박성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일 것이다. 해방이란 조형적 섹슈얼리티가 일반화되는 맥락 속에서 행동의 자율성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행복과 사랑,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결부시킬 수 있는 개인 생활의 윤리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성적 관용과 구분된다.
여성의 입장으로 이 문장을 접하면서 타인에 대한 존중은 으레 자신과는 다른 성性에 대한 존중으로 대치됩니다. 어떤 균형의 관점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논할 때 이 책을 읽는 것은 여성뿐 아니라 절대 다수의 남성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씁쓸함이 베어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할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하는 개인 생활의 윤리를 창조할 때 자유라는 해방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기득권과 비기득권이라는 이미 자연화 되어 버린 성의 정치학적 구조로 인해, 개인 생활의 윤리라는 새로운 길을 뚫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알기에 자신이 서 있는 생활의 자리를 곁눈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 사랑, 인간>에 대한 공부를 하며 다른 어떤 공부를 할 때 보다, ‘자신을 알고 싶지 않음’이라는 저항에 부딪쳤던 것은, 자신의 기본을 이루는 ‘성’이라는 ‘몸’에 관한 근본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활의 근본에 대한 마주섬. 녹록치 않은 공부였지만은 나와 내가 배치된 그곳을 알게 해주는 좋은 공부이기도 했습니다.
공부함으로 알게 되고
타자와 어울리기에 알게 되는 어떤 것(앎)들이 있습니다.
그 공부의 길이 지며리 이어질 때 개화될 양성兩性과 개인을 꿈꾸며 별강을 마칩니다.
공부라는 좁은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과
함께 걷는 동무들께 항상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