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극(3): 醫山問答 (1-32)

by 찔레신 posted Mar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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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허자(虛子)가 은거하여 독서한 지 30년, 천지의 조화와 성명(性命)의 미묘함을 연구하고, 오행(五行)의 근원과 삼교(三敎)의 진리에 통달하였다. 스스로 인도(人道)를 밝히고 물리(物理)에 통달하여 심오한 원리를 환히 꿰뚫었다고 자신한 채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올라서 실옹(實翁)을 만나 자신의 학식을 드러내고 지혜를 견주고자 하였다.   


實)당신이 동해에서 온 허자요?


虛)그렇습니다. 선생께서는 어찌 알아보십니까?


N)실옹은 가소롭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답했다


實)허허허...당신은 과연 허자로군요. 그대의 옷차림을 보고 음성을 들으니 동해 사람인 것을 알았고, 그 예법을 보니 겸양을 꾸며서 거짓 공손한 체하고, 오로지 혀로써 사람을 대하고 있으니..이로써 내가 그대가 허자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소?


虛)저는 동해의 시골 사람이라 옛 사람들의 조박(糟粕)에 마음을 두고 문투(文套)를 암송하면서, 작은 것에 도(道)를 살펴 왔는데, 문득 선생님을 뵈오니 심신에 놀라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합니다. 감히 대도(大道)의 요체를 묻겠습니다.


實)당신도 제법 얼굴 주름이 있고 머리털이 꽤 세었으니, 먼저 배운 바를 일러 보시오.


虛)어릴 때에는 성현의 글을 읽고 커서는 시예(試藝)를 익히고, 음양의 변화와 사람과 물상의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기르기는 충경(忠敬)으로 하고, 일을 꾀하기는 성실로 하였습니다. 그밖에, 예술, 별자리공부, 병기, 수학, 법률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웠지만, 결국 육경(六經)에 통하고 정주학(程朱學)의 학설을 절충한 바, 이것이 제가 배운 것의 전부입니다.


實)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儒者로군요. 먼저 물 뿌리고 마당 쓴 다음에 성명(性命)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 공부의 차례이지요. 이제 내가 나의 大道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本源부터 일러주리다. 인간이 만물과 다른 것은 곧 그 마음이라고 하지만, 당신에게 묻노니, 인간의 몸이 만물과 다른 것이 무슨 까닭인지 말해보시오.


虛)천지 생물 중에는 오직 사람이 귀하며, 저 금수나 초목은 지혜도, 지각도, 예의도, 의리(義理)도 없습니다. 사람은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은 금수보다 천한 것입니다.


實)당신은 진실로 사람일 뿐이군요. 오륜(五倫)과 오사(五事)는 사람의 예의이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서로 함께 먹이는 것은 금수(禽獸)의 예의이고, 떨기로 나서 무성하게 죽죽 뻗어가는 것은 초목의 예의이지요. 사람으로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하지만, 만물로써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이나 다 마찬가지요. 대저 大道를 해치는 것으로 뽐내는 마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만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뽐내는 마음의 근본이지요.


虛)비록 봉황이 난(翔)다고 하고 용이 난(飛)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금수(禽獸)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요? 그들이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기는 仁이 부족하고, 세상을 다스리기에는 智가 부족하니 어찌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까?


N)실옹은 허자의 말을 듣는 체 마는 체, 짐짓 딴 곳을 응시하는 듯하더니, 불쑥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實)하하, 옛 사람이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을 통치하려는 데에 일찍이 만물에게서 그 법칙을 참고하지 않음이 없었어요. 君臣의 義理는 벌(蜂)에게서, 兵陣의 법은 개미에게서, 예절의 제도는 박쥐에게서, 그물치는 법은 거미에게서 각각 따온 것이지요. 그래서 성인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하신 것이지요.


虛)사람과 만물에 등분(等分)이 없다는 가르침은 우러러 받들겠습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물이 생기게 된 근본이 무엇입니까?


實)허공은 본디 고요하고 비었으며 가득히 차 잇는 것은 기(氣)뿐입니다. 안도 바깥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으니, 쌓인 기가 응집하여 질(質)을 이루고 물건을 만드니 이른바 땅, 달, 해, 별들이 그것이지요. 대저 땅이란 물과 흙을 바탕으로 하고 그 몸은 완전히 둥근데, 쉬지 않고 돌며 공중에 떠 있지요. 만물은 거기에 의거해서 붙어 있답니다.


虛)옛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선생님께서 '땅의 몸이 완전히 둥글다'고 하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實)하하, 만물의 영체(影體)는 모두 둥글지요. 달이 해를 가릴 때 일식(日蝕)이 되는데, 가리는 몸통이 둥근 것은 땅의 몸통이 둥글기 때문이지요. 땅이 달을 가릴 때 월식(月蝕)이 되는데, 가리는 몸통이 또한 둥근 것은 땅의 몸통이 둥글기 때문이지요.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근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 보면서도 그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소? 옛 사람의 기록을 전하는 말을 믿는 것이, 어찌 직접 목도(目睹)하여 실증함만 같겠소?


虛)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큰 땅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 땅이 기(氣)에 실려있기 때문인가요?


實)군자는 道를 논하다가 이치에 꿀리면 항복하고, 소인은 도를 논하다가 말에 꿀리면 꾸며댄다고 하였더니, 그대가 곧 그 모습이 아니요? 그대는 지난 날 얻어들은 것에 집착하고, 이기려는 마음에 젖어 논변을 꾸며대니 어찌 도를 구하는 태도이겠소? 대저 끝없이 크고 넓은 공간 속에서는 육합(六合)의 구분조차 없는 데 어찌 아래와 위가 있어서 떨어지니 마니 하겠소?


虛)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결국 中華의 제도와 풍속을 반드시 지남으로 삼을 이유도 없겠습니다.


實)그렇소. 대개 중국인들은 중국을 정계(定界)로 삼고 또 서양인들은 서양을 정계로 삼고 살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사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이면 기준을 어디로 한들 모두 마찬가지이니, 그 모두가 제 나름대로 정계인 셈이지요. 사람들이 옛 습관에 안주해서 새것을 살피지 않고, 이치가 눈앞에 있으나 탐구하지 않으므로 그 실정에는 감감하군요. 오직 서양의 어떤 지역에서만 지혜와 기술이 정밀하고 상세해서 측량이 빈틈없이 잘 되고, 땅이 둥글다는 등의 학설에 대해서는 이미 의심의 의지가 없어요.


虛)그러면, 칠정(七政)이 우리 지구를 둘러싸고 있으니, 지구가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겠군요?


實) 그렇지 않아요.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이 모두 세계 아님이 없으니, 별들의 세계로부터 본다면, 지구의 세계도 또한 하나의 별에 지나지 않지요. 한량없는 세계가 하늘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이 지구의 세계만이 공교롭게도 하늘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요.


虛)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비로소 허공에 여러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神의 힘으로써 저 구소(九霄)에 올라가 놀기를 희망하였는데, 해와 달의 세계조차 다르다고 하오니, 저는 끝내 이 혼탁한 세계의 어리석은 생활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實)대개 연못의 물고기가 용이 되고, 바다의 곤어(鯤魚)가 붕새로 화하고, 흙속의 굼벵이가 매미로 변하니, 사람의 신령한 재주로 어찌 술법이 없음을 걱정하겠소? 10년 태식(胎息)을 하면 신선이 되어 껍질을 벗고 불타의 몸이 되어 하늘 높이 떠오르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여러 세계를 노닐면서 길이 깨끗하고 상쾌함을 누릴 것이요.


虛)그러하오면, 오위(五緯)는 오행(五行)의 정기요, 항성(恒星)은 만물의 상징인데, 아래로 지구의 세계에 응하여 화복(禍福)의 징후를 나타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實)근래에 천체 운행에 관한 연구가 진척을 보게 된 것은 궁중의 지원에 힘입은 것인데, 별들의 명칭이 붙은 것은 역술가들이 제 마음대로 정한 것이지요. 그들은 천체에 관한 일을 번잡하게 늘어놓고 억지로 맞추어서 속된 일에 인용하는 것과 같은 잔괴를 부려 점술가의 무기로 삼았으니, 그 망령됨이 천문분야에서 이보다 더할 수 없어요.


虛)허어, 선생님, 너무 심하신 질책이 아니실지요?


實)어어, 그렇지 않소. 무릇 지구를 허공에 비하면 미세한 티끌에 지나지 않고, 중국은 지구에 비하면 10수분의 1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의 둘레를 몇 개의 경계로 나누어 거기에 별의 출현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일리가 없지 않으나, 중국의 여러 州를 억지로 여러 별의 세계에 배합시켜 나누거나 합침으로써, 재앙을 알아맞히거나 상서로움을 짐치려 하니, 사람이 그 간사한 꾀과 망령됨이 오히려 부끄럽지 않겠소?


虛)아! 그렇군요. 그러면 식(蝕)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일식(日蝕)이란 陰이 陽에 항거하는 것이며, 月蝕이란 양이 음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때에는 월식이 일어난 때를 당하여도,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이치가 있습니까?


實)陰陽說에 구애되고 의리(義理)에 빠져, 天道를 살피지 못하였음은 先儒의 허물이지요. 대저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지구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될 뿐이오. 경도와 위도가 같아서 삼계(三界)가 일직선 상에 놓이면, 서로 가려져서 침식 현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 뿐이지요.


虛)그러면 땅에 지진이 나고 산이 옮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實)땅이란 대저 살아 있는 물체이지요. 맥락이나 영위(榮衛)가 마치 사람의 몸과 같은데, 다만 그 몸집이 크고 중량이 무거워서 사람처럼 뛰고 움직이지 못할 뿐이오. 이 탓에 땅에 조그마한 변화만 생겨도 사람들은 반드시 괴이하게 여겨, 재앙이나 상서(祥瑞)의 징조라고 해서 망령된 추측을 해요.


虛)선생님의 지혜는 전해오는 책들 속에만 빠져있는 제가 감히 추측할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청컨대 사람과 만물의 근본이 되는 이치를 들려주십시오.


實)대저 땅이란 허공 속의 活物이지요. 흙은 그의 살과 살갗이고, 물은 그의 정기와 피이고, 비와 이슬은 그의 눈물과 땀이고, 바람과 불은 그의 魂魄과 영위이지요. 그리하여 물과 흙은 안에서 빗어내고 햇볕은 밖에서 쬐어서 원기를 한데 모이도록 온갖 물체들을 길러내지요. 초목은 땅의 모발이요, 사람과 짐승은 땅의 벼룩이나 이와 같은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