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인이란 누구인가?(83회 속속 별강의제)

by 肖澹 posted Aug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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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_ 환상 (부제: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별강자 : 초담

 

 

  1894년 조선반도의 민중들은 피지배계급으로서 최소한의 생계를 근근이 허락 받으며 살아갔다. 이 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민중혁명은 지배계급의 착취와 수탈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일어난다. 당시의 조선 반도는 지배계급(관리)의 부정부패와 민중을 향한 착취의 구조가 노골적으로 정당화 되었던 사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은 (열강의 침탈위협 이외에도)지배계급의 착취와 수탈로 인한 경제적 무능의 상태를 벗어날 길 없음을 시사하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조선반도 거리의 남성들은 이전부터 이후까지 무기력에 빠져있다. 1894년 조선을 방문한 헤세-바르텍은이들이 절대 하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이다’(53)라고 하며 일을 해도 재산을 모으기는커녕 살림형편이 나아질 수 없었던 당시 조선남성의 생활의 표면을 증언한다. 일하지 않음은 곧 경제적 무능의 자인이다. ‘경제적 무능의 상태는 나아가 정신적 무력증을 초래(아도르노)’한다.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을 비판하는 맥락에서)대중의 일상을 장악하여 일상으로서 작동하는 사회의 보편적 산업을 거슬러 순응하지 않았을 때 피할 수 없는 경제적 무능을 이야기 한 것이라면, 조선반도의 남성들은 순응하기에 경제적 무능의 상태에 빠졌고, 순응하여 경제적 유능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지배계급으로의 이동이 막혔으며, 정신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 할 수 있는 사상과 문물을 맛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무력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순응과 불순응의 범주를 넘어 경제적 무능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부패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정신적 무력증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경제적 요구를 거세당한 조선반도의 남성들은 그 무엇도 욕망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요구에 대한 충족의 경험이 없는 아이는 무엇인가를 더 요구하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진다.  

  2020년 현재 신문지면상의 가장 핫한 이슈는 정부의 부동산정책 발표이다. 정부정책의 주요 골자는 다주택 소유자들에게 집을 팔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갑을론박, 아니 갑갑론박은 좌, 우를 막론하고 곧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소요한다. 단순히 집을 여러 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다주택을 소유한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자신이 그 집에 거주하기 위해서 혹은 임대사업을 통한 이윤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집값이 뛸 것을 계산하여 집을 여러 채 보유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들의 계산 된 희망을 들어주듯 지금까지 남한 땅의 집값은 나날이 오르고, 좌든 우든 어느 정부에서든 이 집값을 잡는데 실패해왔다. 그리고 시세차익을 노려 집을 여러 채 사들여 되팔 던, 소위 이 갭투자자들은 집을 여러 채 소유하는 것으로 부터해서 집값을 띄우는 데에 까지 한 몫 한다는 것이다. 그 피해는 실제 집에 거주하며 생활을 해야 하는 생활인들 그리고 점점 집을 마련하는 장벽이 높아져만 가는 가련한 청춘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하지만 이 실상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의문은, 어제 나와 함께 차를 마신 내 동료가 갭투자자이고, 학원비 충당에 골머리 썩던 우리 엄마, 아빠 조차 아파트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는 유사 갭투자자임을 부인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의문이다.

  집을 실제 생활, 실제 삶의 터전이 아닌 상품으로 전락시킨 남조선 대중들의 일상생활은 어디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말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 돈이라는 물질을 향한 욕망을 우리 스스로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1894년 조선반도의 민중들이 열악한 경제적 생산수단과 수탈·착취의 구조 속에서 무기력 속으로 침잠해 갈 수밖에 없었다면 2020년 조선반도 그 이남의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체제가 상징하는 욕망을 향하여 고삐가 풀렸다.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가 충족되었음에도 체제가 부어주는 욕망이 다시 요구가 되어, (충실하게도)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향하여 폭주하는 되돌이표 속에서 살아간다. 누구나가 물질적으로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정답처럼 읊조리고, 체제가 잡아준 행복의 틀일지언정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실제 삶에 내려앉지 못하고 이데올로기가 흩뿌리는 환상에 빠져 허우적 된다. ‘환상에 규제당한 자신의 욕망(라캉)’을 돌아 볼 눈은 스스로 닫아버린 채 열심히라는 미명아래 달리는 발을 멈추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이데올로기는 환상이 아니(니체)’라는 것을 증명하듯, 나와 내 이웃의 삶속에서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하며 말없이 일상과 하나 되어 기동한다.

  그렇게 1894년 헤세-바르텍이 조선의 거리를 걸으며 보았던 조선민중들의 배고프고 비참했던 과거는 잘 살고 싶다는원망願望의 강력함’(프로이트)으로 환상과 조응한다. 그리고 잘 살고 싶은 원망으로 (당대를 지배한)이데올로기라는 환상에 너무 잘 적응한 조선반도 이남의 대한민국은 자신을 알기위한 분석을 알지 못한다(분석의 반댓말은 적응_라캉). 이것이 환상으로서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