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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以 (2020.08.15. 한국인이란 누구인가? 별강)

 

이 별강은 닫혀있던 조선의 폐쇄성으로 인해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그런 과거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대한민국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콜롬버스가 새 대륙을 발견할 때 우리는 성종조의 썩어 문드러진 사회에서 취해있었고, 도이치에 신교운동이 바야흐로 맹렬하던 때에 우리는 사화의 미친 놀음에 빠져있었고, 태평양에 에스파냐·포르투칼·화란 모든 나라의 장사배가 분주히 왔다갔다 하고, 시베리아와 인도에 영·()의 군도 소리가 요란하던 때에도 우리는 임진·정유·여진·이괄 등의 난리로 눈뜰겨를이 없었다. 남들이 새로운 과학 연구에 파묻혀 그 결과 놀라운 발명, 발견을 신이나서 하는 때에 우리는 당파 싸움에 미쳐 나라도 세상도 모르고 있었다

1)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361.

 

1. 우리에겐 문()이 있습니까?

 

요컨대 외국과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 놓이면, 개국하여 이 문화를 채용하고(고대 중국에 대해), 다음시대에 다소 쇄국하여 채용한 문화를 소화하면서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낸다.(헤이안시대, 도쿠가와시대)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의한 극단적인 격차에 대해서는 상대방을 본보기로 삼아 따라 잡는 것을 지향하고(미국에 대해), 그 목표를 적어도 군사력으로 단기간에 성취한다.(메이지유신으로부터 러일전쟁까지

2)  가토슈이치 <일본문화의 시간과 공간>, 작은이야기, 박인순옮김, 2007, 214.

 

우리 역사에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처럼 나라를 쇄국하고 개국할수 있는 열린인식이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볼수 있었을까요? 꽁꽁 잠궈버려 스스로 문을 잃어버리게 된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한 것일까요? “특정한 종류의 눈멂(blindness)이 인식에 작용하고 있다(William James, 1978)”는 말처럼 우리 한국인에게 특정한 종류의 눈멂이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 작용을 아는 순간 그것은 이미 눈멂이 아닐테고 또한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 참 덕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눈멂에는 긍정적 작용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눈멂은 현재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요? 역사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그 무감각의 지점을 감각화 하기 위해 애써 더듬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2. 우리에게 문()이 있습니까?

 

만약 현실에 대한 지각이 불쾌감을 수반한다면 우리는 그 지각을 단념할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 왜 그런말을 하는지 도대체 자기 입을 통해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주체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유도하는 것이 분석의 시작이고,

진정한 분석에의 참여는 자신의 말에 대해 의문을 던질 때이다 3) 브루스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맹정현 옮김, 2002, 55.


우리의 역사는 고통과 슬픔을 많이도 간직합니다. 고통은 인식하는 순간부터 더 커질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의 조상들은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음으로 살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그 순간부터 지반(地盤)이 흔들리고 깊은 슬픔속으로 빠져들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토록 무지에 의지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우리도 그러한 패턴이 모방되어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무감각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눈먼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시작으로 너자신을 알라고 교훈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질문은 우리에게 무지(無知)의 틈을 열어줍니다. 우리에게 질문이 생기기 시작될 때 우리는 보이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3. 우리에게 문()이 있습니까?

 

임계의 위기상황은 말 그대로 새로운 비평의 가능성을 개시하는 사건으로서 교통공간 속의 유물론적 마주침과 그 외상적 깨침에 진솔하려는 의지와 실천이다. 무릇 위기는 사이의 효과이며 기성의 규칙이 일관되게 장악할 수 없는 공간속의 창조성을 가리킨다. 나와 너의사이, 공동체와 공동체사이, 규칙과 규칙사이, 현재와 미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창발적 외상(外傷)의 효과를 말한다. 비평은 이 사이를 창의적으로 견디는 일이며, 그 사이에서 얻는 효과의 생산성에 체계적으로 기대는 일이다 4) 동무론 289쪽 

  

우리나라 역사에 침범은 빠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약자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도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 그 주변을 배척해버리는 민족주의를, 가족주의를 만들어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약자는 자기보다 약한 자의 지배자가 되려하고 이러한 기쁨만은 버리지 못한다던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약한 국가는 더 약한 백성에게 외상을 입히면서 해소해 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버리지 않고 견뎠다면, 그리고 배우려 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그리워해봅니다.

침범의 다른 이름은 개입일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 한다는 것은, 그리고 더 나아가 배우려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날 상처를 각오하고 스스로 선택한 침범이 허용된 장소로의 이동일것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자신의 세계에 개입시키고 자신의 패턴을 흔들어보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문()일지 모릅니다.

 

4. 우리에게 문()이 있습니까?

 

정녕 인간다운 무늬(人紋)가 지구상에 내려앉게 된 시작은 인간의 정신이 차분하고 지속적인 집중의 행위를 내재화하면서인데, 바로 이 행위의 알짜가 공부의 수행이고 또 그 실천속에서 극대화된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크다    5)   <집중과영혼 >   378쪽

 

흔들린다는 것은 위협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익숙함을 흔드는 사건은 자연스러운 저항을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위험한 인문학적 사건이 이제는 더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주체가 되어 문을 열고 닫을수 있고 질문을 시작으로 타자와 자신의 개입을 인정할수 있는 말들(개념)을 만나면서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무늬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인식하는 자에게 있어서 모든 충동은 성스러워진다는 니체의 말처럼 공부와함께 우리의 충동들이 성스러운 무늬로 남겨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