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_ 외출1

by 肖湛 posted Jun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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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_ 외출1


- 아직은 순박했던, 1990년대를 연상시켜 이질적 공기를 만들어낸 그 커피숍을 나오며 떠올린 물음은 내가 다시 그 커피숍을 갈수 있을까? 였다. 그 공간에 다시 발을 들여놓음에 왜 남다른 결정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내 감성은 왜 그 공간을 이질적이라고 접수해 버린 것일까???

 

- 언젠가 월든을 통해 소로우(1817~1862)의 삶을 엿보면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톺니바퀴 속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던 자신을 알게 된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나름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음으로, 나름 대형마트 보다 동네 슈퍼를 애용함으로, 나름 웬만한 거리는 차가 아닌 자전거를 이용함으로, 휘몰려가는 세상에 끄달리지 않으려 애써왔던 실천들이 이미 그 시스템 안에서의 운신일 뿐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 인간의 무의식은 타자의 언어로 되어 있다던 라캉의 말처럼 내 무의식이 타자의 말로 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말과 함께 자본의 말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인간의 정리情理조차 단박에 메뉴얼화 시켜 상품으로 등록해버리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정체성이 소비자라는 사실에 첫 번째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 지목된 정체성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의 소외를 감내해야하는 것은 또한 자신일 뿐이다.


- 세상의 말이 온통 특정의 말들로 도배되었을 때, 서로 맥락 지어진 그 말들은 인간의 의식을 장악한다. 장악된 의식은 그 말이 의도한대로 세상을 표상한다. ‘나는 조금 다른 말을 가졌어라고 확신하며 방구석에서 대양의 고래를 잡던 인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제 안에 표상되어진 심리, 정서, 혹은 의도 등이 타인을 만남과 동시에 세상에 도배되었던 특정 말들로 전유되어 버린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흔히 겪는 오해로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해를 피하지 못하고 굴절毁折되어 버리는 언어환경 속에서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는 연대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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