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於先學 3_ 茶山 丁若鏞,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by 肖澹 posted Feb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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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丁若鏞,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독후감)


1. 책 한 권 읽고 한 사람을 통으로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더욱이, 글의 이면에 생생히 살아 움직이되 시계視界로 드러나지 않는 지은이의 정신을 만난다는 것은 그 글에 개입하는 읽는 이의 실력있는 정신이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아마 같은 글을 읽어도 제가 비축해온 이력에 따라 제각기의 다른 체험을 하는 것과 유사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다산을 다 알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통해 만난 다산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2. 유배지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체감하게 된 다산은, 일상이 곧 공부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 일상이 다산의 생활에 가져다준 정신적 결기는, 일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가져온 것일 뿐 다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다산의 이 태도는 무엇이고,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흔히 다산 사상의 중심으로 효제孝弟를 꼽는다. 이를 보여주듯, 그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낸 가계家誡에서 다산은 이 늙은 아비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하였고 또 어렵고 험난한 일을 고루 겪어보아서 사람들의 심리를 두루 알게 되었는데, 무릇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도 안되고 믿을 수도 없다." (유배지에서 온 편지143p) 라고 말하며 천륜과의 관계성을 따져 인간성을 판별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사귀라고 말한다. (물론, 공자孔子 혹은 유교라는 학통의 한 귀퉁이만 알아도, 또는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밑바탕으로 살아가는 극동아시아의 조선반도에서 살아가기만 하여도, 왜 정약용이 효제로서 사상을 펼쳤는지 알수 있을 만큼 그 귀결점은 당연스럽기도 하다.) 더 이야기 해보자면, 이 가계의 여는 문장은 몸을 닦는 일修身은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이고, 이어서 자기 몸을 엄정하게 닦아놓았다면 그가 사귀는 벗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이어서 같은 기질로써 인생의 목표가 비슷하게 되어同氣相求 친구 고르는 일에 특별히 힘쓰지 않아도 된다.“(유배지에서 온 편지143p)라고 한다. 사귐의 대상을 분별할 때에도 효제였지만 그에 앞서 자기 몸을 닦는 일의 근본에도 효제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아들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에서는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孝弟)가 그것이다. 반드시 먼저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학문이 이미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유배지에서 온 편지39p)라고도 한다. 교우交友, 수신修身에서 더 나아가 독서에서도 효제가 근본이다. 근본이 확립되었을 때 학문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고 한다. 수신과 교우를 넘어 독서하는 것의 근본이 오직 효제일 수 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한반도의 인물들에게 이 말은 어떤 소용이 있을까?

 

3. ‘효제孝弟라는 인간과 인간을 대할 때의 태도 즉, 자기 근원인 혈육을 대할 때의 태도와 독서/공부하는 정신은 어떤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산의 정신을 조형한 형식의 한 축인, 유교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유교의 비조 공자가 말했고, 이후 후학들이 따랐던 유교의 가장 핵심 이념인 효제, 그러니까 이 부모와 형제사이에서의 관계를 (유교이데올로기를 잠시 내려놓고)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점에서 살펴본다면, 효제가 어떻게 공부(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이 유교정신이 어떻게 다산의 정신을 키우는 태도를 만들어 냈는가를 상상하고 가늠하게 한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형태의 사회구조 속에 태어나며, 그곳에서 부모라는 최초의 타자를 만난다. 그 다음이 형제자매이다. 그리고 이 부모, 형제자매라는 가족과 함께 평생을 관계맺음하며 살아간다그렇기에 그 가족구성원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다. 굳이 현대 심리학인 대상관계이론을 가져오지 않아도, 따로 첨언하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태어나 처음 만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교감하는 사람의 중요성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 이다. 이 지점에서 유교에서 배울 수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점을 살펴볼 수 있다물론 유교라는 전통적 시각에 입각한 효라는 것은,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현대인들에게 원리적으로 수용되기에는 어려운 가치이지만, 세상에 태어나 가장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 맺음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태가 형성된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면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사안이다. 학문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이것의 연장으로 생각하여 볼 때, 효제가 공부의 근본이라는 말 또한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부모(타자)를 살피고 공경하기 위한 태도를 실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연적으로, 어쩌면 필사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몸의 상태가 있었을 것이다. 유교의 핵심이념이라고 하는 신독愼獨이 단박 떠오른다. ‘홀로 있을 때 삼간다라고 했지만 그 삼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도 수동적 긴장을 놓치 않는 경()으로 수렴 된 수신修身하는 몸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론만을 들이쟁여 몸이 동반되지 않은 앎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몸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가능하게 만드는 공경하는 대상과 한 공간에 머문다. 이른 바 어른이 계신 것이다. 조심스럽고 사뭇 긴장되기도 하지만 혼자 편하게 있을 때와는 결이 조금 다른 몸의 운신이 느껴진다. ‘응하기에 민첩해진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몸의 상태로 자기 밖의 타자를 살펴 만났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누구 보다 타자에 진정眞定/鎭靜으로 응하듯, 텍스트에 진정眞定/鎭靜으로 응할 때 어떤 독서하는 경지가 생성될까? 책에 쓰인 한 글자가 일상으로 내려와 부모와 나 사이의 태도로 실천 되었던 이의 독서하는 현장을 상상해 본다. 글과 생활이 일치했기에 가능한, 몸이 함께 가는 공부하는 이의 독서. 텍스트(알기)가 곧 몸(되기)이 되는 수신하는 독서. 그런 근본 위에서 입지立志한 공부(독서)가 어떤 지경으로 공부하는 이를 몰아갈지 현재의 독서하는 현장에서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4. 정약용이 인륜 안에서 효제의 틀로 자신의 몸을 갈고 닦으며 타자를 만났던 것을 상상 해볼 때 그 태도로서, 왜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을 일회일기一會一期라고 하는지 알게 된다사람의 정신은 분절된 것이 아닌 유기적 무엇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방과 방 사이가 통합되어 흐른다. 내가 누군가를 물화시킨다면, 모든 관계에 물화의 그늘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공대한다면 그 공대는 다른 모든 관계에도 있을 것이고, 역시 자신을 향해서도 있을 것이다. 한 번의 만남이, 자기존재를 증명하는 한 번의 기회이자, 내가 어떤 정신이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살리는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변함없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그 태도가 만들어낸 정신과 그 정신이 개입하는 경우境遇를 상상한다면, 유배지에서 온 편지를 읽고 정약용을 떠올렸을 때, 왜 효제가 모든 것의 근본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사람의 길인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알게 된다. 타자(혹은 텍스트)를 물화시키거나 소외, 혹은 배제 시킬 수 없는 유교라는 틀. 그리고 그 틀 안에서 기민하고 재바르게 타자를 공대하여 존중하는 수행적 관계로서 생성 된 태도‘. 이것은 인륜에 터했기에, 바꿔 말하면 유교라는 형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정신의 결절이었다고 생각된다.

 

5. 정리 하자면, 원리적·근본적·교조적으로 효도 해야겠다라는 것이 아니다. '유교, 즉 인륜 안에서 운신하므로 현실에 충실한 관계에서 생성되는 유교가 가진 인간(부모, 형제)에 대한 태도를 선용善用하여, 어떻게 독서(공부)할 것인가 혹은,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태도로 타자와의 관계에 임 할 것인가를 마중하여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사족>

물론, 유교의 이점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유교 안에서 여성의 자리는 묶임의 자리이자 상처의 자리였고, 그래서 원한의 자리였다는 평론이다. 또한 여성은 유교의 정신적 결절의 열매에서 소외 된 자리에 처해있기도 했다. 어머니의 자리가 부모의 한 축으로 남성인 아버지와 나란히 있고 또한 효도해야하는 관계 안에 있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자리 역시 정신적 결절이 거세 된 공부하지 못하는 자리임에는 마찬가지였다.(홍대용은 을유년 연행에 다녀와 어머니와 처를 위한 언문연행록을 따로 만들었다. 양반집이더라도 여성에겐 당시 사유의 매체인 한문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맹점을 넉넉히 차치하고, 다만 인간과 인간이라는 관계성에서 맺힌 태도가 주는 정신적 결절 안에서만 유교의 이점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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