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회 속속 별강 <청소로 시작의 문을 연다>

by mhk posted Jun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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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로부터 청소만 하며 사냐 혹은 밥은 해먹고 사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군더더기가 없고 살림의 흔적이 없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식사준비를 하는 중에는 우리 집 주방도 여느 집 주방과 다를 바 없을 것 이지만 식사종료 후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기본적인 청소는 매일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많은 시간을 청소에 할애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레 스스로와의 약속이 된 몇몇 규칙들 덕분에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신발은 기존의 신발이 신발로서의 기능을 잃었을 때 새 신발을 구매하며 낡은 신발과 자리를 교체한다. 신발이 일정한 수를 유지하기에 겹쳐서 보관하거나 자리가 부족한 경우는 없다. 장기보관을 하는 양념류를 제외하고 냉장실은 1, 냉동실은 1~2주단위로 식재료는 순환을 한다. 냉장고가 비워질 즈음에 행주로 한번 문질러주면 냉장고 대청소를 할 필요 없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 주말에 주로 장을 보며 식재료는 1차 손질을 거친 후에 냉장고에 보관한다. 미리 손질이 되어 있기에 주중에 반찬을 만들 때 시간이 단축될 뿐 아니라 게으름도 피할 수 있게 된다. 시기를 놓쳐서 식재료를 버려야 하는 경우 또한 드물다.

포장음식을 주문할 때는 먹지 않는 소스나 음료, 일회용 수저 등은 필요 없다고 미리 알려주어 불필요한 것이 집에 쌓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요리가 끝나고 나면 식사하기 전 간단하게나마 인덕션이나 후드 주변은 행주로 닦는다. 열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닦으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닦아낼 수 있다. 비가 온 후에는 낡은 양말이나 버리려고 모아둔 옷조각으로 창문틀을 닦는다. 주방에서 사용하던 낡은 집게나 나무젓가락을 이용하면 수월하게 구석구석 잘 닦을 수 있다. 겉옷은 옷걸이에 걸어서 건조를 한 후 그대로 옷장으로 옮긴다. 빨래를 개는 수고로움을 덜고 모양을 잘 잡은 상태로 옷걸이에 건조하면 주름도 덜 생긴다.

필요한 생필품이나 식재료는 떠오르는 대로 미리 메모를 한다. 메모지에 적힌 대로 구입을 하니 충동구매나 중복구매로 인해 불필요한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없다. 생수를 먹다가 보리차를 먹게 되면서 주전자가 필요했지만 구입하지 않았다. 주전자 대신 냄비를 활용한다. 물병 세척솔 대신 물병에 수세미를 넣어 숟가락이나 길다란 조리기구를 넣어서 세척을 한다. 살림이 간소해야 정리가 수월하니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면 구입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집안 곳곳은 나에게 자주 정리대상이었다. 냉장고속의 것을 모조리 꺼내어 전원을 끄고 탈착이 가능한 것들은 세척을 하며 정체불명의 음식은 과감히 처리하기도 하고, 씽크대 상하부장의 그릇을 꺼낸 후 먼지를 닦아내어 줄을 세우며 재배치 하는 것을 즐겼다. 결혼 후 내 집이라는 전용 공간이 생기면서 즐거운 취미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침마다 이불의 먼지를 털어내고 침대를 반듯하게 정리를 한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잘 정돈된 침대 위에 몸을 뉘울 때의 아늑함은 기분 좋은 선물이다. 빨래를 햇살에 바싹 말릴 수 있는 날엔 햇빛의 고마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바스락거리는 양말이나 속옷을 반듯하게 개어 각자의 서랍에 넣는다. 그것을 하나씩 뽑아 입고 신을 가족을 생각하며 정성껏 빨래를 갠다. 딱히 정해진 시점은 없으나 수건이나 행주는 과탄산을 풀어 삶는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자주 빨래를 삶으셨다. 어린 마음에 고구마도 아니고 감자도 아닌 빨래를 왜 그렇게 삶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어머니와 똑같이 빨래를 삶고 있다. 단순히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나는 지금껏 빨래를 삶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 청소 유전자는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앉으셨다가 일어서는 자리에는 흔적이 없다. 집안팎을 정리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익숙하다. 그럼에도 유난히 힘을 기울여 대대적인 청소를 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또 병이 도졌나 보다'며 말씀하시곤 했다. 허나 그것이 병이 아니라 아버지만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남편과 다투고 나면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심혈을 기울여서 집안 곳곳을 정리하며 청소를 한다. 다투는 중에 드러난 우리의 못난 모습을 말끔히 지우고 힘겹고 답답한 마음을 벗어버리고자 집안곳곳을 닦아낸다. 물리적인 장소의 정리 정돈은 마음을 청소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청소를 하는 과정 중에 서서히 안정과 여유를 되찾으며 화를 가라 앉히게 되고 다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상대에게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내가 머무는 장소의 정리와 더불어 마음이 정돈되면서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

청소를 즐기기 위해서는 청소가 힘든 노동이 아니어야 한다. 정리 되어가는 과정, 정리된 후의 쾌적함 모두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청소를 즐기기 위해선 손쉽게 언제나 할 수 있어야 하니 내가 선택한 것은 최소한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주방이든 서재든 옷장이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은 작은 것이라도 쉽게 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물건이 굴러다니는 것 없이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사물과의 관계는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사물로 구성된 장소가 갖는 힘은 분명 내 가족에게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리라 생각된다.

청소 혹은 정리정돈은 머무는 장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정리와 정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래도록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작동과 더불어 정리정돈 강박증 따위의 유전자를 물려주어 나를 힘들게 한다며 불만 가득한 때가 있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유별난 유전자는 좋은 종자로 변하게 되었고,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진심 어린 감사를 하게 되었다. 일어서지 못하도록 붙잡거나 미끄러지는 지점에서 덜어내고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이며, 남겨진 것은 어떻게 배치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청소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회명재에 청강생으로 처음 가게 된 날, 는길은 화장실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한마디 한마디 똑똑 떨어지는 는길의 말 속에서, 그 말이 향하는 화장실에서 나는 어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지런하게 욕실화를 벗는 과정 중에 나는 차분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내 일상의 매 순간을 엄숙하고 절제된, 차분하게 욕실화를 벗는 자세로 임한다면 분명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삶 속에 내려 앉히고자 하지만 여전히 핑계와 변명이 따른다. 허나 '시작은 인간의 최고의 능력(한나 아렌트)이라고' 했으니 매일 청소와 정리정돈으로 시작의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