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수 없음

by 형선 posted Apr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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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jpg


2주 만에 현충사에 갔다. 곧 터질 듯 부풀은 은행나무 단지(短枝)를 보고 최초의 목격자가 될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한 주를 건너 띄게 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행나무에 열린 여린 잎들이 인사를 한다. 안녕! 나도 안녕!

500년 된 이 은행나무의 가지는 고개를 높이 들어야 다 볼 수 있다. 기둥은 몇 아름이 되어 혼자 다 안을 수 없고. 한동안 내 시선은 은행나무 외양에 있었다. 잎 색의 변화와 기둥의 결, 오다니는 벌레들, 떨어진 은행 등. 그러던 어느 날, 이 나무는 왜 넘어지지 않는 거야? 어떻게 서 있는 거지? 서율이도 대답할 질문을 했는데, 그러자 그 모든게 당연할 것 없이 새롭고 신기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오래된 것과 관계 맺기가 계기가 되어 이곳을 찾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좌충우돌 넘어진 날엔 애먼 나무를 째리기도 하고, 간절한 날에는 나무에 대고 기도를 하질 않나, 하늘로 뻗은 가지를 부러워도 했다가 마음이 물러지면 마음 없는나무에게 위로도 받고 심심하면 낭독을 했다. 비 없던 여름엔 물도 조금 보탰다. 그러다가 이제는 밖으로 드러난 것 말고 뿌리가 궁금해 뿌리에 닿자고 깊게 걷는 시늉도 한다. ‘내게도 이런 뿌리가 있으면 좋겠어요속닥이면서.

 

아기와 24시간 붙어 지낼 때가 있었다. 하루종일 갓난아기에 매여있는게 당시로서는 고역이기만 했다. 그래도 어렵기만 하던 그 시절 특별한 경험이 몇 있었는데, 그 하나가 달라진 몸의 감각이었다. 어찌된일인지 아이의 울음소리로 배고픔, /소변, 아픈 것을 분별하고 손의 감각으로 체온을 소수점까지 정확히 맞히게 됐다. (나만 하는 경험은 아닌것 같다.) 시간과 경험이 조금 더 생기자 병원에 가야 할 열인지 두고 봐도 될 열인지 아이에 관해서는 의사를 제치고 내 앎이 맞을 때가 많았다. 밀착된 몸의 거리때문에 생긴 앎일까, 아기가 커가면서 밀착동일시가 개별성을 인정치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기도 했지만 거울단계(라캉)’에서 생생했던 그 원초적 감각을 잊을 수 없다.

지난 속속 한글 詩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이가 할미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자 할미는 아이 그릇에서 불은 멸치를 골라내주었다.‘(김희승) 아이의 찡그림이 언어는 아닌데 곧바로 할머니는 메시지로 번역한다. 상호작용 혹은 관심과 집중의 결과로 관계에 깃든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언어 없이’  ‘듣던’  절대적 육아의 시간이 떠오른 것이다.

2주 만에 찾은 현충사 은행나무를 향해 걸으며 저 오래된 나무의 말을 듣는것도 그렇게 가능한것 아닌가 라고 물었다. 관계에 기대어, 다시 열리는 어떤 감각에 기대어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무의 말도 좋지만, 우선 사람의 말부터 헤아릴 일이다. 어제는 몇 주 동안 교회에서 뵐 수 없었던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정 행사 때문이겠거니 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힘든 일이 있다는 몇 마디와 울음도 말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몇 안 되는 제한된 말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상대가 하지 않으니 듣지 못하는 말이 있다. 몸은, 어떤 대상에게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하지 못한 말과 듣지 못하는 말의 일부는 그러한 영역에 있을 것이다. 말해도 되는 대상 그래도 안전한 대상을 몸은 알아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괜스레 은행나무에게 물었다. 들리는 말은 없고 저 나무의 뿌리는 보여진 적이 없다. 다만 숨은 저곳에서 비밀로 부친, 어떤 노동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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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지막은, 四隣으로부터의 신뢰입니다. 물론 신뢰의 관계는 방법이 아니라 성취이긴 하지만, 이는 그 과정(생활양식)과 성취[Nachträglichkeit]가 서로 면밀히 되먹히는 점에서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량-깜냥의 완결은 신뢰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나는 여기에서 인생의 비밀을 봅니다. 시계가 나를 신뢰하고, 고라니가 나를 신뢰하고, 네가 나를 신뢰하고, ()이 나를 신뢰하시는 중에, 한 인생의 가능성은 아름답게 맺힙니다." (<차마,깨칠 뻔하였다>,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