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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3 13:19

ㄱㅈㅇ, 편지글(2)

조회 수 278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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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섯 살이 된 아들 녀석이 나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면 응(應)하여 보란듯이 대거리하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그 체계를 유지하고자 스스로의 힘(말)으로 알리바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생명체가 가진 코나투스의 힘에 대한 경외(敬畏)와 함께 자의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교차한다. 생명체로서 진화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인간이 개방된 자연에서 벗어나 만화경/파노라마로 에워싸인 실내화된 거울 사회인 도시로 터를 옮기며 그 변화된/자연화된 문화사회적 조건 앞에 항상성 조절을 위해 몸이 키워낸 자(의)식의 역설(逆說), 야생의 도착(倒錯), 그 괴물이 바로 이 시대의 에고인 것이다.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인류라는 계통 발생적 단계를 축약/농축/압축한 모습이 아이의 개체 발생적 단계와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일곱 살의 아이는 자신이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통시적 깊이와 공간이라는 공시적 넓이를 가지고 최선의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이만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변명을 하며 살아간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변명을 하기도 하고, 배고픔과 갈증 같은 신체 조건의 변화로 야기된 일차원적 정서에 휘둘려 가까운 약자에 천노(遷怒)를 하며 그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타자를 원인으로 지목하며 변명하고,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의 지불은 뒤로하고 호감과 호의로 무성의하게 시작한 관계의 파국을 악감과 악의로 변명하기도 한다. 
욕구(욕망)가 권리와 동등하다 생각하는 아이는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욕구(욕망)의 강도와 대상에 따라 폭력을 동반한 화를 내거나, 울며 보채거나, 떼를 쓰는데 정서에 동반하는 일차원적인 행동들은 연령에 맞게 훈육을 통해 제지하고 적절한 개입을 하지 않으면 폭력적 성향이 강해지고 성인이 돼서도 그 기질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항상성 유지 및 번식을 위한 리비도적 욕구와 그 욕구가 의식/문화와 맞물리며 변질된 다양한 욕망을 충족 시키지 못해 발생하는 감정(정서와 느낌)은 그에 엇낀 폭력적 행위 양상과 더불어 (천)적 없이 실내화된 환경에서 안전하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철 지난 옷처럼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아이의 양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훈육의 목적은 바로 이 욕구(욕망)의 좌절에서 오는 정서적 불안정(흥분)과 이에 동반하는 폭력성을 최소화하는데 있다. 초기 인류(아이)나 동물들이 흔이 보이는 욕구(욕망) 앞에 보이는 '무매개적 발작성(즉각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인간의 사회성을 유지하는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훈육이라는 사회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쾌락을 연기(延期)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참기다. 인류가 이룩한 식사문화에서부터 성문화를 포함한 다종다양한 문화들은 모두 이 연기술의 집성체인 것이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두고 식욕을 참고 식사 예절을 지키는 것으로 시작해 성적 대상을 두고 연애라는 고차원적 절차를 두는 것은 연기술(참기)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아이의 양육에서 쾌락을 연기하는 참을성을 길러 내지 못하면 미래의 풍경은 어둡기만 하다. 아니, 이미 그 전조 증상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사소한 부정성(타자)을 참지 못하고 폭력으로 번지는 사건 사고들이 이 시대의 풍경을 장식하고 있다.
핸드폰을 위시하여 아이들을 둘러싼 전자 매체들은 아이들의 감각 비율과 사고의 패턴을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전자 매체의 터치 기능은 아이들의 참을성을 키우는데 비각이다. 아이(와 같은 어른)들은 핸드폰을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타자(부정성) 없는 나르시시즘으로 에고만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원치 않는 화면은 터치로 밀어내고 채널을 돌리면 그 뿐이다. 기술 문명이 낳은 '터치' 기능(멀티태스킹/하이퍼링크)은 우리 아이들에게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과 쾌락을 연기하는 능력을 앗아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가 가져온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좋아하는 것들을 쉽게 얻으며, 즉 쾌락을 연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서 자란다. 부정성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 쾌락을 연기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자본제적 체계와 결합하며 타자(부정성) 없는 다양성으로 자신의 에고만 가꾸는 '소비자 인간'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부모(양육자)가 해야할 일은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는 것이다. 도덕적/정신적 교육의 한계를 깨닫고 아이의 몸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주는 매체와 틀을 통한 훈육을 우선시하는 것이 주효하다. 일상에서 접하는 매체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파악하고 선택과 배제, 배치와 사용을 달리하여 매체의 노출도와 접근 가능성을 조절해야 한다. 가령 거실에 TV를 없애면서 책장으로 대체하고, 함께하는 독서를 통해 책이라는 매체를 자연스레 노출시키고, 전자 매체의 사용 시간을 정하여 정한대로 지키고, 소변을 보기 급박한 직전 정확한 조준을 위해 3초를 세어 참도록 하고, 갖고 싶은 장난감은 바로 사주지 않고 훗날의 가까운 기념일을 기약하며 미루는 등속의 것들이 아들 녀석에게 적용한 사례다. 더불어 아이에게 일상생활에 예절이라는 틀을 주어 리비도적 욕구 앞에 행동거지 단속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함으로써 즉각적 쾌락의 탐닉을 막고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의 시간과 비용을 치르도록 하여 쾌락을 연기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동시에 욕구(욕망)의 좌절(억압)에서 오는 정서적 불안을 대체하고 승화하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

(2)
자신의 성장 과정을 잊은 채 쉬 내뱉는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는 투식(套式) 속에 '나'라는 에고의 체계는 기원을 잊고 풍경을 자신의 알리바이로 참칭(僭稱)한다. 에고가 자신의 태반인 몸을 잊고 그저 생각으로써 '나'라고 참칭하듯 '나'라는 개념으로 호출된 에고는 생성의 역사인 타자의 개입을 잊고 현재를 박제화한다. 장구한 진화과정에서 의식이 출현하고 재개입(再介入), 되먹임, 개념 호출(呼出), 사후성(事後性)의 기능들이 정신의 작동방식과 깊이 연루돼 안착되면서 인간이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병이(秉彛)와 강충(降衷)은 이미 세속에 오염돼 원래(元來)의 영도(零度)로 돌아갈 수 없는 구조에 되잡히고 말았다.

문명의 발달과 도구의 사용으로 서식처(棲息處)가 특수화된 환경의 압박을 끊어 내고 안정된 실내화(室內化)로 접어들면서 금시(今時)의 반응양식은 차츰 동물의 반작용적 태도(시공간)를 넘어 정신의 고유하고 독립적인 상징 체계로 옮아왔다. 여타 동물들과 매한가지로 주어진/특수화된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경쟁(fight), 도망(flee), 먹기(feed), 짝짓기(fuck) 형태의 반작용적 행위 단계를 점점이 벗어나 외부 환경이라는 규제와 제약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적응(適應)이라는 일차원적 단계를 넘어 생명사의 정화(精華)로 불리는 독립적인 '정신이라는 체계'를 조형했다. 허나 동시에 외부/타자와 통기처(通氣處)/매개처인 몸을 소외시키며 실내화/자폐화될 징조(徵兆)를 드리운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흐름 속에 내동댕이 처진 생명은 엔트로피와 길항(拮抗)하며 자기동일성의 유지라는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삶에 개입하는 타자들의 차이를 동반한 반복된 행동양식을 생존과 무관한 미세한 차이는 사상(捨象)하며 감각기관에 수용된 리듬, 박자, 패턴, 규칙 등속의 정보를 대뇌 피질에 지도화하는 과정을 거쳐 복합된 정보를 통할(統轄)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종내(終乃) 주어진 정보를 장면(scene) 인식으로 전환하여 기억하는 상징화(象徵化)를 가능케 만들었다. 상징화는 흐름의 분절(分節)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시간(통시적 흐름의 분절), 공간(공시적 흐름의 분절), 인간(생명 진화 흐름의 분절)이라는 개념의 탄생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상징화가 불가하거나 미약한 동물의 경우 반응양식의 기괄(機栝)과 긍경(肯綮)은 정서인데 생존을 위해 리비도적 욕구에 대응하여 즉각적인 대처를 위해서라도 고통과 쾌락에 기반한 이해 관계로 기억 정보가 구성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생명이라는 체계도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는 운용 전략을 경제적 효율성에 입각하여 선택해 온 적응(適者生存)의 역사인 것이다. 이와는 대조되게 실내화/도시화를 굄돌삼아 상징화의 첨단을 내달리고 있는 인간은 정서적 운용 방식에 상징화를 더한 느낌(feeling)이라는 표상(表象)을 덧대어 상호작용(개입)을 바탕으로 보다 복잡다단한 반응양식을 형성해 왔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 필수적인 금기(禁忌)와 규칙(틀)들은 금시(今時)의 이해 관계에 바탕을 둔 정서적 운용만으로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부적격자를 도태(淘汰)시키고 분절하고 상징화한 시간 관념을 탑재(搭載)한 에고를 통해 당장의 쾌락을 연기(延期)할 수 있는 인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금기)'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규칙)'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들이 살아남게 된 것이다.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의 발달은 지도화된 감각을 임의(任意)로 조작할 수 있는 물리적 능력의 발달과 공진화(共進化)할 수밖에 없는데 당장의 고통을 속이거나 완화시키는 기능(보상)이 없이는 '무매개적 발작성'을 넘어서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 상황에 통증을 조절하는 '자연 무통증'이나 사회화의 필수 요소이며 모방/전이의 바탕인 '감정이입' 등속은 뇌과학에서 밝혀낸 신체 상태를 기반으로 운용되는 정서와 느낌을 가공(加工)하여 거짓 표상(상징)을 생성하는 증례(證例)들이다. 체계는 기원을 잊는다고 했듯 기원은 사회화 과정에 적응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에고의 자의(恣意)와 자율성(自律性)은 기원을 잊고 재개입, 되먹임, 개념 호출, 사후성의 능력을 오용(?)하여 일종의 도착(倒錯)된 불인(不仁)한 존재를 키워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뢰가 아닌 자가증폭된 애증(愛憎)이나 호오(好惡)로 이입하여 인간관계의 틈(深淵)을 채워나가는 운신(運身)인데 유교의 성인(聖人)과 불교의 성불(成佛)을 위시하여 등속의 인류의 수행적 공부길은 오만해진 에고를 지계(持戒)나 예절(禮節)이라는 틀을 선용(善用)하여 본바탕(마음의 최소화/몸에 기반한 변증법적 통합)으로 되돌리는데 그 향방(向方)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상투적 표현 속에 묻힌 '나'라는 역사를 되돌아 보지 않고서는 에고라는 증상의 덩어리가 자신도 모르게 타자에 개입하고 있는 부정적 영향(影響)과 후과(後果)를 알아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배설한 똥 덩어리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사린(四隣)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줄도 모르는 체(채) 언제까지 '원래(元來)'로 자신의 못난 '꼴'을 변명하고 있을 것이냔 말이다. 누차 얘기하지만 자신이 개입하고 있는 수위를 명찰(明察)하여 자숙(自肅)하고 존재론적 차원(생활양식)에서 폐를 최소화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에고의 작란(作亂)에 놀아나는 꼴을 면치 못한다. 에고로는 에고의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지계나 예절이라는 틀을 선용하여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공부를 통해 몸을 묶지 않는다면 에고는 그 틈새로 악지를 부리며 치고 든다. 약속을 통한 낭독적/연극적 삶은 일종의 지계나 틀로써 소소하나 에고의 배치를 달리하여 변하지 않는 몸을 변화시키는 변침(變針)의 지도리 역할을 한다. 

(3)
공부의 성과는 몸의 변화를 증례(證例)로 삼을 수밖에 없기에 늦깎이 공부는 제멋대로 길을 낸 몸의 역사(버릇의 습기)가 깊어 묵은 때를 벗겨내기 위한 비용이 한량없다. 그래서 공부는 어려서부터 면강(勉強)해야 하는데 옛부터 소학(小學)을 공부의 시작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학은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으로 대별되는데 현대어로 풀어보자면 입교는 육아와 교육, 명륜은 인간관계 법식, 경신은 몸가짐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인륜인데 이 장에서는 송두리째 예절을 말하고 있다. 선생께서 '계(戒)가 사회적 정(定)에 이르면 족하다'는 글을 쓰신 적이 있는데 조선왕조가 오백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에는 소학이 계가 되어 사회적 정에 이른 바가 다대하다 할 수 있겠다.

요즘이야 하수상한 시절이라 아이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수발하고 비위 맞추느라 절절매지만 옛부터 아이가 자라는 시의(時宜)에 맞춰 소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절 교육이라고 해서 별스러운 것은 없다. 관계를 양식화하여 인간(間)이라는 그 사이(深淵)를 임의로 메꾸는 것을 허여(許與)하지 않음으로써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부하(負荷)를 최소화하고 더불어 부지불식간 '몸이 좋은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거지(行動擧止) 단속을 통해 끓어 넘치는 리비도 에너지를 일상의 생활양식에 고루 배분(配分)하여 속(心)이라는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는 여분의 에너지를 최소화하도록 배려했을 뿐이다. 소학 훈육의 핵심인 행동거지 단속과 함께 여건으로 주어져야 할 사항인 '생산적 권위(어른의 존재)'와 에고의 구성 방식에 간여하는 '고유명 호출'을 같이 언급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인륜의 오륜 중 부자유친(父子有親)과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살펴 알 수 있듯 일상에 어른의 존재는 몸가짐을 겸제(箝制)하는 예절 교육에 빠질 수 없는 핵심요소인데 속으로는 경(敬)으로 몸가짐을 삼고 밖으로는 의(義)로 행동거지를 단속하는 내경외의(內敬外義)의 바탕에는 공경과 두려움의 대상인 어른이 지근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른의 시선 아래 일상을 조직하고 영위해 나가야 하는 조건을 무시하고는 연면히 이어진 유교적 전통을 설명할 방편(方便)이 없다. 어른이라는 생산적 권의를 공경하도록 연계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자 형이상학적 개념은 효제(孝悌)인데 정약용과 이덕무를 비롯해 유교의 근본을 효제에 둔 실학자들의 형안(炯眼)을 보더라도 가히 일상에서의 어른과의 응대를 위한 '수동적 긴장'이라는 몸가짐과 그것이 겉으로 삼가면서 드러난 예절이라는 '수행(遂行)의 충실성'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와 병행하여 조상의 업적과 공과를 대대손손(代代孫孫) 잊지 않고 포폄(褒貶)(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도 자신의 행동거지로 발생하는 영향과 후과를 부단히 성찰하게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어른은 본(本)/모델이 되는 전이/모방의 대상으로써 그 공경의 밑바탕에는 생산적 권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적어도 이 시대의 어른은 대체적으로 경행(經明行修) 공부로 이루어낸 인금과 덕으로 인해 믿고 따를 수 있는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터전인 시장에서 소비와 변덕, 소문과 고백, 욕망과 스펙터클, 표절과 혼성모방으로 상상적 세계를 이동하는 소비자의 상상 가능한 권위라 해봐야 소유한 금전의 양이나 재부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과 일치된 지 오래인지라 재승박덕(才勝薄德)을 따질 계제도 아니지만 신독(愼獨)과 예절을 생활화하며 충신효(忠信孝)의 절개를 지키고 의(義)를 위해 사직(辭職)을 마다하지 않고 나아가 죽음마저 불사한 이들의 생산적 권위와는 이제 와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윤리를 위해 죽을 수 있었던 조상과 스승들을 기리는 향사와 제사라는 피드백을 통해 강화된 공경심은 우리 시대의 제스처로 남아있는 예절 속의 공경과는 맞닿을 수 없는 현저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앞서 행동거지 단속을 통해 끓어 넘치는 리비도 에너지를 일상의 생활양식에 고루 배분하는 것이 소학 교육의 주된 효과의 하나라 말하였지만 예절이라는 틀은 몸을 묶어, 주위 매체의 변화에 조응하여 정서와 느낌을 기반으로 쉴 새 없이 거드럭거리며 오만하게 운용되는 에고의 변덕을 최소화하는데 주효하다. 에고가 '나라는 개념'의 호출을 통해 사후적으로 강화되어 정체성을 부여하는 통할성의 끝판왕이라면 일상의 몸 단속을 통해 생각을 최소화하는 형식 위주의 삶은 에고의 강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사회적 호명(呼名)은 물론이고 내부로부터의 재유입, 되먹임, 사후성이라는 뇌기능을 통해 호출된 '나'라는 에고는 호출 빈도와 방식에 따라 강화, 유연, 왜곡, 분기된다. 에고로 똘똘 뭉쳐 외부와의 연결 고리를 잃은 원시인, 유아, 정신분열증, 극단적 종교주의자, 맹목적 이데올로기나 사랑에 덮씌워진자를 비롯해 에고의 통할성이 나뉜 예외적 다중 인격자와 나아가 공부와 수신(修身)을 통해 에고를 비운 성인(聖人)과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에고의 처리 방식과 연루(連累)되어 있다.

타율적 근대화 과정에서 옛공부의 성취와 전통이 절맥되고 말았지만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릴 수는 없다고 하듯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를 이어받아 상술(上述)한 소학 공부의 장점은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되살려 낼 필요가 있다. 자본과 기술의 격자구조 속에서 전자매체의 거울상에 광고화된 표상들에 둘러싸여 환상의 차이를 소비하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결국 자아를 구성하는 일상의 매체를 선택과 배제, 배치와 사용을 달리하는 매체 정치를 통해 자아를 재구성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아이의 삶에 부모는 아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수위(首位)의 매체이므로 부모가 먼저 생산적 권위를 지닌 어른이 되지 못하고 자라지 않는 어른으로 남아 에고라는 블랙홀의 중력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이 시대의 교육은 허물어지고 괴물과 짱구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일곱살 난 아들 녀석도 벌써 에고의 자장(磁場)에 잡혀 이미 에고국(國)의 어엿한 성골(聖骨)이 되었다. 늦지 않게 일상에서 아이에게 ‘본(本)’을 보여 생활양식의 ‘틀’을 줌으로써 생산적 권위를 기반으로 '몸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야한다. 방목(放牧)도 목자(牧者)도 부모의 길은 아니며 '부모가 온 효자라야 자식이 반 효자'라는 말처럼 부모부터 각고(刻苦)의 노력을 통해 몸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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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3.05.03 13:20

    *ㄱㅈㅇ씨가 내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는 중에 얻은 글을 다시 보내왔기에 그의 양해를 얻어 이곳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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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3.05.17 21:51
    *ㄱㅈㅇ씨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enivrer)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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