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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적 존재와 여성


낭독의 약속과 실천

선생님은 낭독의 실효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다. 몸에 내려앉은 공부와 신독에 낭독이 효과적이었다는 숙인들의 자득도 들었다. 몇 번 낭독의 시늉을 해보았으나 그 생활화는 요원해 보였다. 의지만으로는 에고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약속의 힘을 빌렸다. 낭독의 실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낭독을 실천하며 겪은 어려움은 낭독 그 자체보다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듣는 내 말과 전자기기를 통해 나오는 말 사이의 이질감은 녹음하기를 주저하게 했다. 녹음된 내 말을 들을 때면, 언뜻언뜻 내보이는 말하기의 버릇과 그에 얹힌 심사가 드러나 마음이 불편했다. 타자의 말()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읽지 못하는 것은 읽기의 문제라기보다, 고착된 내 언어습관과 어휘의 한계를 드러낸다.

작년 9월에 시작한 낭독의 약속이 5개월을 넘었다. 여전히 약속에 쫓겨 별음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새 얻은 자득이 조금 있다. 몸에 이른 목소리의 울림이 공간에도 전해짐을 느낀다. 공간에 남은 잔향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장소를 돌아보게 한다. 이렇게 낭독은 내 몸과 장소를 한결 차분하게 만든다.

 

여성의 운신

낭독의 책으로 동무와 연인을 택했다. ‘동무와 연인은 동무론 3부작 중 그나마 접근이 용이한 책이다. 어려운 책을 낭독할 때 읽기와 이해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나의 책을 통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재구성하거나 특정한 관심사를 바탕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 ‘동무와 연인을 읽으며 관심을 둔 대상은 연인의 대표적인 표상, ‘여성이었다. (제목은 동무와 연인이지만, 연인 이외의 관계도 다수 있다. 스승과 제자, 지식인과 동무, 아들과 어머니까지 그 관계는 연인 사이만을 다루지 않는다.)

동무와 연인의 사례가 예시하는 여성들의 운신은 실로 다양하다. ‘2의 성의 저자이지만 남자(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는 범사의 전형적인 갈등을 피할 수 없었던 보부아르, 명민하고 당당했지만, 하이데거 앞에만 서면 소녀가 되어버린 아렌트의 사례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음에도 남자의 세속과 부대낄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이 가진 지난함을 보인다.

한편, 견고한 남자의 성() 속에서 자기 구제의 길을 찾아 재바르게 행동한 살로매와 사랑의 물매로 벤야민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라시스는 남자의 세속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여성의 재치를 보여준다. 한발 더 나아가, 해리엇 테일러와 크레이스너는 세속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남자를 구원하기에 이른다. 우울증과 인생의 회의에 젖어있던 밀을 다시금 일깨운 것은 해리엇 테일러와의 지적 교류였고, 폴록이 자신의 천재를 세상에 드러낸 동력은 크레이스너의 인정에서 비롯되었다.

 

여성의 가능성

신경증은 크게 강박증과 히스테리로 나눈다. (생물학적인 성구분으로 두 갈래를 구분하는 것이 임상의 사례와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강박증은 남성의 구조로, 히스테리는 여성의 구조로 본다. 억압된 주체를 회복하고 자기 욕망에 몰두하는 강박증 환자와 달리, 히스테리 환자는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이를 연기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려 한다. 히스테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여성은 그 내면에 타자를 내재화하고 있다. 여성은 타자를 통해, 그리고 타자와 함께 자기 주체의 완성을 이루어 나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앤소니 기든스는 현대 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에서, 여성들이 사적영역에서 고유한 친밀성의 세계를 발전시켜 왔다고 말하며, 부상하는 친밀성 영역에서의 혁명 주체는 바로 여성이라 말한다. 감정적·정서적으로 여성에게 의존적이고, 대외적 관계와 자아정체성에 안주해 온 남성은 이러한 친밀성의 구조변동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자 허라금이 말하는 여성주의 윤리도 이러한 바탕 위에 서 있다. ‘하나의 진리만을 말하는 도덕적 세계에서 소외된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자세라 말할 수 있는, 여성의 보살핌의 윤리는 사적 영역을 넘어 사회 문제 해결에도 필요한 덕목이다.

 

부사적 존재

타자의 말로 거세된 우리 모두는 (사회적) 여성이다. 자리의 배치에 따라 잠시 남성의 역할을 맡을 뿐, 영원한 남성은 없다. 남성이 될 수 없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번성하는 에고와 개인들만의 세상인 한국 사회에 필요한 존재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에게서 부사적 존재의 실마리를 찾아본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 장소의 분위기를 읽으며 슬금하니 주변을 밝힐 수 있는 자, 복종과 지배를 현명하게 오고 갈 수 있는 자, 이처럼 몸이 좋은 사람은 부사적 존재의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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