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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ㅅㅇ님, 담연,  김ㅇㅇ님, 회옥, 희명자가 모였습니다. 
<집중과 영혼>을 426쪽까지 읽었고,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는 310쪽까지 읽었습니다.
*계획보다 한 주 미뤄서,  6월30일(화)부터 <인간의 글쓰기>낭독을 시작합니다.


* 김ㅇㅇ님이 선택한 암기 문장입니다.
[사람은 자기혼자서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오직 대화상대들과의 관계속에서만 주체가 된다.]
(<집중과 영혼> 418쪽에 인용된 Taylor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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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도 없이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자동화된 에너지'에 스스로 사로잡힌 모습은, '죄'라는 무시무시하고 오해가 잦은 이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현 사회의 갖은 병리 현상을 밝히는 데 꽤 유용해 보인다. 전술했듯이 '자동화된 에너지(automatized energy)'는, '타인을 마치 재료인 듯 여기면서 진정한 관계를 외면한 채 혼자 힘으로 자신의 세상을 제작해내려는 욕심이자 환상'(아렌트 1996, 250)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간단히,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인 '타자에 대한 미안함', 즉 존재론적 겸허를 망각해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집중과 영혼>, 422쪽)


(헤겔처럼) 마치 거대한 변증법적 순환의 운동 그 전체 속에서야 신(神)의 무늬를 읽을 수 있듯이, (짐멜의 말처럼) 영혼이 자신으로부터 객관적 실재를 거쳐 다시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길을 통해서 자아의 통일적 완성에 이른다고 하듯이, 혹은 (사르트르 식으로 말해서) 어느새 내 존재의 진실을 읽어내고 있는 타인들의 인식들을 모짝 내 의식의 지향성 속에 재통합시키는 즉자-대자적 존재구성 속에서야 어떤 구원을 희망할 수 있듯이, 오직 가장 낮은 자리에서만 보이는 테크노피아의 무상성(無常性)을 거쳐 되돌아오는, 그래서 맑게 슬퍼진 영혼이야말로 이후의 인문학적 주체가 된다.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291쪽)

 

  1. No Image 31Jul
    by 희명자
    2020/07/31 by 희명자
    Views 1630 

    2020년 7월, <서서희 공지>

  2. 6월 16일, <타자에 대한 미안함> <인문학적 주체>

  3. 6월 9일, <낭송> <살이 아닌 근육>

  4. 6월 2일, <가만한 응시>, <타인의 지식>

  5. 5월 26일, 집중이 불러오는 인간의 새로운 자리

  6. 5월 19일, 고다와루(拘泥る)

  7. 5월 12일, <타자들의 세계> <풍경은 상처(기원)를, 그래서 윤리를 숨기며>

  8. 4월 29일, <축적된 집중의 실행>

  9. 4월 21일, <長遷而不反其初則化矣>

  10. 4월 14일, <변화> <어리눅기>

  11. 4월 7일, <탈자아화하는 경향> <대화의 사건성>

  12. 3월 31일, <생산적 퇴행> <공동체를 실천하는 이들>

  13. 3월 24일, <인간의 '몸'> <어울림의 지혜>

  14. 3월 17일, <愚公移山>, <이유 없는>

  15. 2020년2월25일,<不二> *2주 방학

  16. 12월 24일, <대상 선택Objektwahl> <고백>

  17. 12월 17일, <신의 운명> <생활양식의 연대>

  18. 12월 10일, <훈육> <가족주의>

  19. 12월 3일, <리비도적 기원> <동무>

  20. 11월 26일, <차분하다> <말의, 어떤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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