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말하기와 남성적 말하기의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일반적으로 여성적 말하기는 원칙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공감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남성적 말하기는 인과관계나 의사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남성들의 언어가 여성의 언어에 비해서 인과관계나 의사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다 라고 주장하는 출판평론가 변정수씨의 비평을 중심으로 남성적 말하기와 여성적 말하기에 얽힌 개인적 경험들을 통해 여자의 말을 배운다는 것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남성적 말하기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비평한 변정수씨 글의 한 대목이다.
서구사회에서라면 혹시 정말로 남성들의 언어가 그런지도 모르겠고, 그런 점에서 역시 서구에 뿌리를 둔 여성주의가 그것을 남성적 언어로 간주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나는 바로 그 언어로 인해 남성사회에서 소외되어 왔고, 그 소외와 배제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남성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즉 남성으로서 젠더-사회화되는 것을 가로막아왔다. 사적이고 비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핑계로 남성 사회로부터 배제당하는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겠지만, 그 반대라 해도 배제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의 언어는 인과 관계나 의사 전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언어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정확하다. ‘언어 이전의 묵시’ 에 동참할 수 없는 인과관계에 집중하면서 의사전달이 명료한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계집애처럼(!)’ 말 많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1)
이 글 속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남성적 말하기 방식이 오히려 언어가 불필요한 묵시의 방식이었음을 폭로한 대목이다. 언어가 불필요한 묵시의 방식, 말없는 말하기의 방식은 권위적인 남성의 말하기 방식이다. 대체로 집안에서 아버지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필요한 것들이 순서대로 차근차근 채워진다. 그저 눈짓 한 번, 손 짓 한 번, 헛기침 한 번으로도 마실 물이, 먹을 밥이, 심지어 입어야 할 속옷까지도 그들 앞에 착착 챙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의 권위적인 말없는 말하기의 방식은 공간을 옮겨 직장에서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 남성 상사들은 여성 비서가 챙겨주는 갖가지 종류의 사적물건들까지도 아무 말 없이, 아무 불편 없이 받을 수 있다. 이는 오랫동안 이루어져 온 묵시적, 관습적인 말없는 말하기 방식의 결과로 조용히 수행되어 왔기에 심지어 자발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그의 경험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인과관계에 집중하면서 의사전달이 명료한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계집애처럼(!)’ 말 많은 것으로 간주되어 남성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왔다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른 여성의 말하기 경험과 비교하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어렸을 적에 나는 말을 똑 부러지게 한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대여섯 살 적 이야기다.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같은 말뿐 아니라, “저는 지금 심부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같은 말까지, 제법 정확한 문장을 구사해 명료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나의 이런 말하기 방법은 자주 지적질을 당했다. 요약하면 “여자애가 말을 그렇게 똑 부러지게 하니 정 없다”라든가, “못됐다” 같은 지적은 예사고 “주는 것 없이 얄밉게 말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정확하게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으면 말 자체를 하기가 어려워진다.2)
이 여성의 말하기 경험을 앞의 남성의 경험과 비교해보면 적어도 의사전달이 명료한 말하기는 우리사회에서 여성적 말하기도 남성적 말하기도 아닌 배제된 말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앞의 남성의 경험에서 의사전달이 명료한 말하기는 여성적인 말하기로 간주되어 배제되었지만, 여성적 말하기 방식으로 간주된 의사전달이 명료한 말하기 방식을 사용한 여성도 외려 그 말하기 방식으로 인해 여성적이지 못 한 것으로 비난받았던 경험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기에 관한 이 여성의 경험은 나의 경험과도 유사하다. 어려서 나는 엄마와 아줌마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박진감이 넘치면서 무언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어 이상하게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동참하고자 한마디씩 거들곤 하였고 어린 시절 나의 별명은 약방의 감초가 되었다. 나는 부지런히 훈수를 두었고 나의 말 한마디에 그녀들이 웃기라도 하면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나는 늘 말하기와 관련 된 욕을 듣고 살았는데 예를 들면 ‘쟤는 죽으면 입만 뜰 것’이라는 식이었다.
정리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남성적 말하기는 실은 말없는 말하기였고, 그 외의 말은 배제되거나 여성적 말하기 방식으로 폄하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한 하나의 증언은 지난 81회 속속에서의 진진의 말이다. 진진은 영도와의 만남을 이야기 하면서 영도는 다른 남성과 달리 말하기가 가능하다. 이른바 수다가 가능한 남성이라며 영도와의 만남의 특별함을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진진 역시 말없는 말하기를 남성적 말하기로 부지불식간에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언어는 권력이다. 언어란 사회적 약속이되 불평등 계약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지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종, 계급, 지역, 장애 이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로 인해 언어는 소위 비주류,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이들의 경험과 불일치되는 경우가 많다.3) 곧, 어떤 이유에서든 남성적 주류에서 벗어난 남성의 언어도 그들의 경험과 불일치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말을 배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젠더 문제는 사적인 문제거나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다. 그래서 젠더 문제는 당연히 이해 관계, 권력 관계의 충돌이다. 이제까지 유일하게 군림해온 ‘남성적’인 목소리가 조금 낮아질 때, 비로소 다른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4) 말은 영원한 능동성의 징표이다.5) 따라서, 여성의 말을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그 말이 가지는 능동성을 응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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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정수, https://www.facebook.com/iamddonggae
2) 노혜경, < 성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시사저널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150
3) 정희진, <공공언어의 소수자 차별언어의 문제> 2019 한글주간 차별적 언어학술 토론회 자료집
4)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p.43.
5) <동무와 연인>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