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그의 말(語)
‘나는 배움의 욕망을 억제 할 수 없는데, 들판이나 수목이 아니라 시전의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준다.’(소크라테스)
1. 서양 철학의 비조인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과는 달리 시전의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른바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로 궁구窮究 할 대상을 바꾼 인간학적 전회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이 전회는 자신이 ‘無知의 知’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知者라고 칭稱하는 시민을 찾아 시장을 배회하고 그 앎을 요청하는 질문을 합니다. 정치精緻한 질문이 난무하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의 도정道程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개념을 만들어내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서양 철학을 태동시킵니다. 이 서양 철학의 태동이 시전의 사람들로부터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에 대한 말을 하지만 관념 속의 사람, 문서 속의 사람, 소문으로 들려오는 사람이 아닌 실제 내 생활의 지근거리에 배치 된 (시전의)사람과 대화합니다. 대화의 내용 역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정체政體란 무엇인가? 등의 인간 사회에서 어울려 살기에 피할 수 없는 물음들을 논論합니다. 자신의 주변인, 그리고 그 주변인과 ‘관계하며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윤리적 가치’들을 ‘대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2.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선 자리의 사람들과 대화했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살 던 당시는 그리스의 모든 물적, 정신적 자원이 아테나이로 집중되던, 아테나이 최고의 전성기인 펜테콘타에티아기 무렵(끝 무렵이긴 하지만)이었기에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상당했을 것을 추측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주변에 높은 수준의 식자층이 있었잖아‘라는 식으로 그의 일상생활에서의 대화를 빛바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문 밖으로 나아 가 끊임없이 대화 할 사람을 찾아내고, 그 모두로부터 가르침 받으려 한 그의 정신이 빛을 발發할 뿐입니다. 그리고 문 밖으로 걸어 나와 마주친 사람과는 그와 자신 사이에 놓인 구체적 예시로부터 대화의 물꼬를 틉니다. 자신과 자신이 마주한 타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시작이자, 생활의 자리에서의 대화입니다.
3. 흔히 소크라테스를 ‘알면서 되어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앎이 다만 앎으로 끝나지 않고 ‘영혼이 완성 되는 행복’으로 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앎과 되기가 하나로 합류하여 흐르는 정신은 어떻게 가능해 졌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추측 가능한 지점으로, 그것은 사람, 그 지근거리의 사람과 대화함으로서 가능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닿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타자가 선 자리를 살펴 그/그녀를 만나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향한 끝없는 열망으로서 대화한다는 것은, 대화자들을 상호개입에 터한 유기적 대화의 장으로 이동시킴을 뜻합니다. 차분하게 집중 된 유기적 장안에서의 대화는 발화자라는 존재 안에서 흐르는 정신을 만나게 합니다.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자면 영혼을 마주한다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지식은 상기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유기적 장안에서의 ‘상호개입’은 영혼으로부터 지식을 상기시키고 그 지식은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대화함으로 영혼의 표상체계(지식체계)가 바뀌어 그 물성物性까지 재구성되기에, 소크라테스에게 ‘앎은 되기‘가 되었다고 말해버린다면 무리無理가 될까요???
4.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점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길을 깨달은 것은 모두 언어를 통해서 배웠다는 사실을 자네는 생각해 본적이 없는가?’(소크라테스 회상 137p)라고 기마군騎馬軍 통감統監으로 선출된 자와 담화하는 중 말합니다. 인간은 말을 배움으로 세상을 알(살)아갑니다. 다만 자신이 어떤 언어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고, 자신과 다른 언어 환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부하지 않아)알지 못할 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을 만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건 냅니다. 무지의 지, 알고 있지 못함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말을 만나고 또 만들어나갑니다. 그렇게 말의 정수精髓인 개념을 향해 나아갑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신이 보낸 등애로 표현했듯 그를 마주치는 사람들 중엔 유심히 그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천착穿鑿함에 기가 질려 불쾌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화함으로(말을 이어나감으로) ‘내 영혼이 품고 있되 아직 상기되지 않았던 지식‘을 만날지 말지는 선택일 따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정신을 만나는 기연奇緣 혹은 행운이 있은 후의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5. 또한 소크라테스는 ‘나는 배움의 욕망을 억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시, ‘인간은 배움의 욕망을 억제 할 수 없다’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배움의 욕망을 억제 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이 배움의 길을 가지 않는 다는 것은 인간정신의 가능과 한계를 뒤로 물리는 타락이자 살(알)아가기의 추락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유일한 선은 지식이며, 유일한 악은 무지’라면 배움으로 향하는 욕망은 유일한 선이며, 그 반대의 길은 유일한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왜 배우려는 욕망을 씨앗으로 품고 태어났을까요?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길을 새로운 언어를 배움으로서 알(살)아간다면 삶의 길 자체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길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 않는 다는 것은 삶의 길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이니, 배워서 살(알)아가는 존재인 인간이라면 배움의 욕망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배움의 욕망을 배반하여 수반 된 삶의 추락, 혹은 어리석음은 필연적으로 존재의 속살을 깊게 긋는 상처를 남깁니다. 무지는 악입니다. 자신이 맞은 사태에 無知하고, 자신의 한계와 가능에 無知하고, 상호 관계 안에서 생긴 역동에서의 자기개입에 無知할 때 사람은 상처 받고, 상처 줍니다. 無知했기에 받은(준) 상처/어리석음은 배우려는(워야하는) 그 욕망을 인정하고 멈추지 않음으로서 회복 가능할 것입니다.
6.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노력하게, 그리고 훌륭한 인물이 되면 고아하고 유덕한 인물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만들도록 하게’(소크라테스 회상 106p)라고도 말했습니다. 인문학자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이고 인간은 모방을 피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인간은 누구나 모방을 할 것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지척의 사람을 닮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당신은 누구를 모방하고 있고, 어떤 모방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나요??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훌륭한 인물이 되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옆에 섰을 때 그/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라 말합니다. 실제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서술에 의하면 ‘실로 소크라테스는 모든 일에 대하여 모든 형태로 도움이 되었던 사람으로서, 어떠한 일에 관하여 약간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와의 교제로 인하여 어디에서나 또 어떤 경우에라도 그와 함께 고구考究 하는 것 이상의 도움은 없었던 것이 명백하다. 사실 그와 교제하거나 그에게 사사師事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자기 곁에 없을지라도 그와의 일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적지 않은 이익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하여 알았고 되었습니다. 그 ‘됨’은 ‘도움‘으로 빛났습니다. 배움의 ’의미와 효용과 재미’가 도움이라는 빛이라면, 그 빛으로 훌륭한 인물이 되어 갈 수 있을 때 함께 해야 할 것은, 고아하고 유덕한 인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먼저 훌륭한 인물이 되어감으로 모방의 본이 될 수 있다면, 고아하고 유덕한 인물 혹은 그렇게 되고자 지향하는 인물과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길을 가는 것은 필연으로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빛나는 진주가 있고, 닭 무리 속에서도 학은 선연히 눈에 띄지만, 진주나 학이 그 주변의 진흙이나 닭과 함께 물들어 하나가 되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 반대로 진흙이나 닭이 진주나 학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기에 서로 물들고 물들이며 ‘不二’로서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7. B.C 399년의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사랑하는 동료,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의 법에 의해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다른 도시(국가)로 도피 할 것을 권하는 제자, 동료들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善(지성의 이끔)으로 여기며 고귀한 죽음(noble deth)의 길을 갔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살았기에 소크라테스처럼 죽은 것입니다.
8.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을 배웠습니다. 저 먼 기원전 서양의 한 도시국가에서 꽃 피운 정신은, 삶과 죽음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한귀퉁이가르침 (擧一隅)’을 전해줍니다. 이제, 그의 삶/죽음을 알았기에, 부족하지만 애씀으로 ‘세 귀퉁이(三隅)’ 밝음이 찾아오길 바라봅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등의 인물을 인문학적 실천의 비조(鼻祖)로 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가르침' 때문만이 아니지요. 사숙(私淑)해야 하는 후학들이 이들을 책으로 공부하는 어려움이 여기에서 생깁니다. 인문학 공부의 실천은 앎-됨이 아무 순서없이 엮이면서 얻는 수행성이므로, 독서하는 이들의 함정은 대체로 그 행지(行知)의 이음매를 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대체로 이것을 봄으로써, '자기개입의 공부'가 시작되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