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乎爲士終乎爲聖人
몇 회 전 <속속>에서 ‘성인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발적인 발화의 자리에, ‘始乎爲士終乎爲聖人’이라는 말을 매개로 서 보는 것이 이 글의 시도입니다.
1.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과 호네트(Axel Honneth)를 통해서 알게 된 바, 정신은 ‘인정’을 통해 커나갑니다. 근원적이며 무의식/의식적인 ‘인정’은 물화를 막고 자기 발전이라는 운동성을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申多惠로, 型先으로, 稀溟䦻로 불리는 관계망 속에는 그러한 신비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질문하는 분과 듣는 분들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성인이 되겠다’는 말은 웃어넘길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맺어온 관계의 이력과 장숙의 공기는 허공의 말을 내려 앉힙니다. 인큐베이터처럼, 어떤 가능성을 배양(培養)시킬 수 있는 장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始乎爲士終乎爲聖人. 순자(荀子)는 배운다는 것은 ‘선비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였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는 다양합니다. 저의 경우 혼인 제도와 주 양육자라는 책임에 몰 밀려 위태로웠다는 것. 역할로 만족되지 않던 삶의 정황이 먼저 떠오릅니다. 괴로웠던 일들이 옅어지고 소실된 것은 공부의 성취이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한 또 다른 문제와 괴로움이 출몰합니다. 이러한 반복을 겪으며 스스로 주목하게 된 것은, 공부가, 괴로움 혹은 불쾌와 그것의 해소라는 메커니즘에 진자 운동하듯 머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근사(近思)의 공부이고 자기를 돕는 중에 다른 이들을 돕는 길도 열리니 굳이 문제시할 필요가 있겠냐마는, 선학이며 타자인 고로, 순자의 말을 따라가 그가 말하고 있는 공부의 ‘시작’과 견주어봅니다. 그래서 발견된, 미분화되고 수동적인 ‘학인’의 정체성을 지목해 봅니다.
선비는 차치하고라도 공부하며 무엇이 ‘되겠다’ 함은 새로운 자의식을 요구합니다. 생활인이 ‘생활’을 횡단하여 되어가는 공부의 주체가 되고 ‘학인’으로써 인생을 조형한다는 것은 그 선례가 드물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길을 열어낸 이들을 본 적 없는 와중에 한정된 에너지는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한편, ‘되겠다’고 하였지만, 의지 반대편에는 자신의 능력 혹은 가능성과 대면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어서 쾌락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역경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이유를 모른 체하며, 무엇이 되겠다고 발화하였습니다.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었습니다.
3.
始乎爲士終乎爲聖人. 포털 사이트(Daum) 국어사전은 ‘선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옛날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
순자가 공부의 시작이라고 하였던 ‘선비’는, 벼슬하지 않음으로써 세속의 욕망을 어긋내고 그 공력으로 정신의 장소를 닦는 이들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까요, 藏孰의 공부에도 그러한 면이 있습니다. 쓸모와 실효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세속의 방식으로 교환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가능성을 아끼고 보호합니다.
<집중과 영혼>에서 聖人은 ‘이미 일종의 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달인’ 혹은 ‘장인’은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차분하고 견결하게 이루어지는 집중과 정성’으로 정신의 가능성을 개현시킵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학문을 닦는 선비도, 다섯 시간 글을 쓰는 실천도, 영어공부에 매진하는 일도, 매일 방을 닦는 정성도, 정한 낭독도, 경행도,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지요. 되어가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 자리로 번번이 되돌아가는 일. 마침내 솜씨와 실력에 피어오르는 ‘성스러움’은 그 장소를 모태로 삼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4.
始乎爲士終乎爲聖人. 정신의 고지로 올라갈수록 보이는 풍광은 이 완만한 지대와는 많이 다를까요, 한 걸음 나아가야 다음 걸음이 보이는 안개 많은 날의 보행처럼 공부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맥락을 읽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순자도 ‘선비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할 뿐 그 사이에 무엇이 출현하고 무엇을 삼가야 하며 어떤 계기로 도약할 수 있는지, 세세한 말은 아껴둔 듯합니다. 생활인이며 학인이고 되어가는 공부에 참여하는 이들이 채워 넣을 말을 남겨둔 듯이요.
살고 있는 아파트와 산책코스 사이에는 ‘충무교’란 다리가 있습니다. 충무교에 들어서서 끝나는 지점까지 달리기를 하는데 ‘나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고 하였던 싯다르타처럼,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는 속말을 하며 달리기를 합니다. 질적, 태생적, 근본적인 격차가 차마 아득한 ‘성인’이 되겠다고 발화하면서, 내밀한 콤플렉스, 숨은 욕망, 꼴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큰 말을 붙잡았기에 사사로운 것에서 놓여나는 순간도 있습니다.
외부 없이, 평생 자기 때문에만 괴롭고 상심하고 아파하다가 죽고 싶지 않습니다. 성인은 자기 밖으로 멀리멀리 나아간 정신입니다. 왼쪽으로 휘어 있는 나뭇가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정 반대인 오른쪽으로 확 휘어 놔야 하고, 가운데로 균형 있게 세워 봤자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변덕과 변명의 에고로 기울어진 몸의 반대편, 끝까지 밀어붙인 최극단에 ‘성인’이라는 별(星)이 있습니다.
‘누구나 제 나름의 솜씨들이, 기량들이 있다. ‘성인의 공부(聖人之學)’는 이렇게 각자가 지녀 가꾸고 있는 그 초라한 솜씨와 기량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도 좋다.’ (<집중과 영혼>, 548쪽)
‘그러므로 달인이 이룩한 그 기능적 완벽성(dexterity)의 자리가 인간성(humanity)으로 통하는 지점을 알아채는 게 요령이다.’ (<집중과 영혼>, 544쪽)
*이 글은 85회 <속속> 3분 별강에서 사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