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옛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논어-리인>
발화는 어떤 세계를 열기도 닫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된 개인의 역사를 바탕으로 발화를 배치합니다. 발화로 인한 수치의 경험이 많았다면 우리는 발화를 서랍 깊숙이에 넣어두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수치심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주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부끄러워야 할 곳과 아닌 곳을 재배치 하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욕망의 변증법(라캉)처럼 욕망의 재배치라는 과정을 지나면서 어쩌면 주체화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언어를 가지지 못합니다. 본능적으로 울음을 사용하여 소통하고 서너 살이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써만 스스로를 표현합니다. 하고싶은 것은 많은데 언어의 재료가 부족한 아이들은 짜증으로, 울음으로 그 언어를 대신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가 풍부해지고 소통은 조금 더 활발해집니다. 가족 구성원 이외의 타자를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들로, 새로운 언어들로 타자성을 얻어 재 구성되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의 재료와 경험을 축적하고 축적된 재료로 다시 타자를 만나 사건(事)이 되고 재창조됩니다.
사상가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배우면서 사유가 정교해질수 있다는 건 모방한 언어를 다시 언어화(재서술)하면서 가능해지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어화’는 법고창신(法古創新)처럼 모방과 창조로써 자신의 말로 재서술 되며 정교함을 얻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르네지라르의 말처럼 인간이 ‘모방’하는 존재라면, (언어를 매체로) 좋은 모방의 대상을 탐닉하는 과정안에서, 다시 말해 개념을 만나는 과정안에서 언어화 되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 알지 못한다>
81회 속속 강독 시간에 배운 문장입니다.
말하는 순간 모르는 자가 되어 부끄러움이 피어납니다. 말하지 않음으로 아는 자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피어납니다. 저에게 발화는 언제나 부끄러움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때와 장소를 아는 것’, 혹은 발화(언어화)의 배치는 자전거를 배우듯 ‘해봐야 알 수 있는’ 자득이 필요한 일이 되니 시간과 부끄러움이 쌓이고 섞여 중심을 잡아줄 무언가가 생길수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배우려는 열의가 없으면 이끌어주지 않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일깨워주지 않는다.> <논어-술이>
표현이 언어만은 아니겠지만, 발화를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살펴보고, 별을 보듯 지향을 점검하고 다시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며 걷는 것은 제 나름의 공부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눈을 질끈 감고 발화를 해버리는 원동력이 되어 줄때도 있습니다. 물론 돌아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부메랑입니다.
3.
그러니까 ‘몸이 좋은 사람’이란, 걸으면서 그 걷는 방식만으로, 살면서 그 사는 방식만으로, 그리고 존재하면서 그 존재하는 방식만으로 통속적으로 유형화된 욕망과 열정의 소비/분배구조를 깨트릴 수 있는 결기와 근기를 스스로의 몸속에 기입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그 주변을 바꾸는 위험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다시 밀레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기질과 역할과 지위에 관한 사회적 합의에 대해 언제 어디서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체질을 갖춘 사람이다. 혹은 부르디외식으로 고쳐 말하자면 성향의 기울기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고쳐갈 수 있는 사람이다. <공부론, 170쪽>
모방된 언어들로 정교함을 얻게 되면 그것이 길을 잃지 않게 해 줄 별빛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눈물을 그렁하게 하는 어떤 막막함과 그리움을 그리고 슬픔의 나약함을 선용하게 해 줄 괜찮은 매체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이해가 되는 어느 순간을, 가끔은 누군가도 이해가 되는 어느 짧은 순간을, 그러다 더 가끔은 어떤 동물도, 아주 가끔은 사물도.... 그렇게, 사린(四隣)을 지향하는 몸이 좋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발화를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살펴보고'
말해야만 드러나는 정체나 위치를 저도 경험하고 있어요. 부끄러움을 조금만 견디고 숨을 고르면, 아주 잠깐 타인처럼 자신을 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