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0년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 <메멘토>는 아내의 살해현장을 목격한 충격으로 단기기억 상실증에 걸려 10분밖에 기억을 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기억상실 때문인지 화가 나지만 이유를 모르고 죄책감은 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이 살아가는 그가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낯선 환경뿐입니다. 아내를 살인한 강도를 찾는 것만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타인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강도를 찾기 위해 그는 철저하게 메모를 하고, 보다 중요한 단서는 종이보다 몸에 새깁니다. 낯선 환경에서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이 쓴 메모와 사진이기에 만나는 모든 이들은 의심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오직 타인에게만 적용됩니다.
무의식의 부분은 일시적으로 불명확해진 생각·인상·이미지 등 많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상실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식인 마음에 계속 영향을 주게 된다. 1)
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기억 속에 살아 갑니다. 사라져버린 기억은 부족함이 없었기에 가벼워 날아가 버린 것인지, 잊고 싶은 기억은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겁고 버겁게 남아 상실을 복구하려는 것인지,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결핍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니체의 말처럼 ‘진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면 우리의 기억도 일종의 해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걷기에 버거울 정도의 무게를 가진 기억을 재해석해 본다면, ‘무지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릇된 설정을 억압한다’2)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를 무겁게 하는 어떤 기억에도 무지로 인한 왜곡된 부분이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리고 싶지만 버려지지 않는, 하지만 이상할정도로 선명한 어떤 ‘기억’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2.
래너드는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찍어둔 사진에 메모를 해두었지만 그 메모는 곧 이용당하는 원인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진실을 찾기위한 단서들은 진실과 멀어지는 단서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래너드 자신뿐입니다. 어느날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경찰에게서 부인의 죽음이 강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 때문이라는 것과 강도는 이미 찾아 복수를 했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믿지 않는 래너드에게 복수를 마친 증거사진을 보여주지만 흔들림은 잠시뿐, 주인공은 경찰을 기억하기 위한 사진뒤에 <그의 거짓말을 믿지 마라> 라는 메모를 남기고 자신이 복수를 했다는 증거의 사진은 불태워버립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내의 복수를 위해 존G를 찾아 떠납니다.
‘잊는’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실로 정신적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즉 우리의 의식인 마음에 새로운 인상이나 관념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경험은 의식역(意識閾)위에 머무르게 되고 우리 마음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3)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들을 다양한 증상으로 지워갑니다. 그렇기에 타자에게는 보이지만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증상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긋남은 그러한 증상을 볼수 있게 해주는 틈이 되어 줄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과한’ 반응을 일으키며 스쳐갈지 모르는 사건(事)을 붙잡아 톺아 본다면 미숙(무지)했기에 무거워져버린 해석의 오류들까지도 발견하게 해줄지 모릅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마지막 논문 <정신분석 개요(1940)>에서 분석의 결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석이 어떤 결말을 맺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아가 이제까지 거부했던 본능의 요구를 새로운 각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검토한 후에 그 요구를 그대로 충족시킬 수도 있고 이 요구를 전처럼 다시 거부하되 이번에는 완전히 거부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끈질기게 따라왔던 위험이 제거되었고, 자아의 기능범위가 확장되었으며, 비싼 에너지를 더 이상 소모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4)
해석의 오류를 발견하게 될때 공부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말들은 무거운 기억들을 재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각도가 되어줄 것 같습니다. 속속에서 모방한 언어가 개인의 기억을 재해석 하기 위한 재료가 되어 준다면, 그래서 조금씩 가벼워 진다면 프로이트의 말은 조금 희망적이어 보입니다. 그리도 무거운 기억을 누르고 있느라 소모하던 에너지를 재배치 했을때 개인의 역사는 다시 쓰이고 그로 인해 과거는 새로운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3.
하지만 문제는 ‘발견’이 아니라 ‘(재)구성’ 5)인 것 같습니다. 미래시제 ‘-겠’이 과거시제 ‘-었/았-’으로 되는 일은 저에게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언제나 말(言)은 먼저 가 있고, 말을 지키지 못해 부끄러워 지는 일들을 세기엔 손가락이 부족합니다. 그 약속(言)때문에 넘어지고, 그것을 보는 이(동무)들이 있기에 더 부끄러워 자꾸만 증상처럼 고개를 돌리려 하지만, 그런 ‘약속’과 ‘하겠다’는 말이 ‘하였다’가 되기 위해 부끄럽게 비틀거리며 걷는 그 흔들림 속에서 에고의 비움(虛室)이, 좋아지는 몸이 발견되어 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동무란, 알면서 모른체 한 채, 다만 글의 사밀성-전문성의 방호막 속에 숨어 있지 않으려는 ‘약속’이자 연대로서의 ‘연극적 실천’입니다. ‘글-말-생활-희망’의 계선을 일상 속에 고스란히 노출하면서도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슬금한 지혜의 버릇이자 그 생산적 충실성입니다. 6)
1) 융 <무의식의 분석> , 권오석 옮김, 2014, 홍신문화사, 42쪽
2) 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김정일 옮김, 2007, 열린책들, 173쪽.
3) 융 <무의식의 분석> , 권오석 옮김, 2014, 홍신문화사 53쪽
4) 이무석 <정신분석에로의초대>, 304쪽.
5) 비평의 숲과 동무 공동체, 75쪽.
6)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