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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과 장면 사이의 개입


오 분 전 한 장면이 사라지고 오 분 후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면, 두 장면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조금 전 사납게 짖던 개가 잠시 후 온순해졌다면, 또 절벽에서 휘청거리던 한 사람이 어느새 부드러운 초원에 안전히 착지해 있다면, 그 사이에는 어떤 개입이 일어났던 것일까.

간혹 과정이 생략된, 극적인 장면과 장면만이 선연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이제는 구구절절한 중간 과정을 의도적으로건너뛴 채 위기에서 평화로 이어지는, 그 결정적인 장면들만을 인식해보고는 한다.

감각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장면 의식이고 장면 의식은 아직 동물적 차원의 것(k)”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 장면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다른 장면을 의도하고 생산하는 능력 혹은 개입은, 닿을 수 없는 초능력이라기보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힘이 아닐까.

죽음이 코앞에 닥쳐 도저히 살아날 구멍이 없을 것 같았던, 그래서 궁지에 몰린 포획물을 자처했을 수도 있었던 마테오리치, 그리고 현장(玄奘),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압도되지 않고 다음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행운 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 붙들려 있는 혼미한 의식에서 벗어나 대상들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감을 얻고, 사태의 앞뒤를 시간적으로 펼쳐볼 수 있는 지평”(집중과 영혼(61))을 펼쳤기에 가능한 경지였으리라.

고백하자면, 마테오리치와 현장(玄奘)이 만들어낸, 인간이라는 매체의 개입이 발생시킨 장면 전환의 동력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한동안 골똘해져 있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어졌던 개인적 체험에서 마치 보란 듯이 유독 맑고 밝게 어떤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그 장면에 나의 개입이 분명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개입은 나의 시선일 수도 있고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마음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한 달 전쯤의 일이다. 잠잠해질 만하면 어김없이 심야의 소음을 일으키는 옆집 여자가 다시 쿵,하고 고요를 깨뜨리던 밤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지목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참회했다. 아마도 그날은 다음날 중요한 일이 없는 밤이었기에 마음이 비교적 여유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막 끝낸 명상으로 생각이 비워진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그 무엇보다, 그녀라는 외부는 나의 내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회심(回心)에 닿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장면 전환이 일어났다. 그녀의 집이 순식간에 비워졌고 이삿짐 트럭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그녀가 예정에 없던 이사를 앞당겨 간 날 저녁 나는 너무도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를 낯설어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이사가 며칠 전 나의 참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무리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 후에도 우연인 듯 나타났지만 우연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를 슬며시 드리운 장면들을 몇 차례 더 경험하면서 나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외부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과 말,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도.

누군가 침울한 장면 속에 있다면 그 장면 속에 젖어들기 전에잠시 생각을 비우고 차분히 다른 장면을 일구어보는 놀이를 제안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