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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배운다.

 

 

갑자기 찾아오는 말이 있다. 내 경우에는 살림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수십 년 동안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던 어머니, 할머니를 돕지 않은 채 피하려고만 했던 내게 살림이라는 말은 지루하고 반복되는 노동에 불과했다. 그러다 우연히 우리 가족을 살리고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누군가의 발화(發話)로 인해 그 단어는 나에게 완전히 다른 말로 다가왔다. 밥을 짓고, 방을 닦고, 가족을 돌보고, 다시 방을 닦는 일. 어느 것 하나 살리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왜 살림이라는 단어를 여태껏 살리다라는 말과 연결 짓지 못했을까?

 

수업시간에는 많은 말을 한다.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설명을 하고, 질문을 하고,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가 있으면 타이르기도 하고 잔소리도 한다. 아직 저학년이라 질문을 하면 보통 반 이상은 손을 번쩍 든다. 이름을 한 번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금세 환해지기도, 참을성이 없는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늦게 불리면 빨리 말을 하고 싶은 마음에 얼굴이 금방 일그러진다. 내가 무심코 한 칭찬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거나 조용히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도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던 적도 많다. 오늘 수업이 어제의 반복이고 수업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면 내 말도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가닿지 않고 생명력 없이 죽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과 의사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이기도 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치료에서 진행되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대화(언어)의 중요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언어란 원래 마술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오래된 마술의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1)고 했다. 오랫동안 무수히 많은 말을 쏟아내면서도 말에 대한 감각을 기르지 못하고 공부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의식의 세계를 잊고 있거나 모른 채 고통이나 증상만을 안고 살아 온 신경증 환자처럼 중요한 일부를 놓치면서 내 스스로 말을 통해 열리는 또 다른 길을 가로막은 셈이다.

 

올해 초부터는 영어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다. 다른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취미나 어학공부의 차원을 넘어 내 방밖에 보이지 않는 정신에게, 문득 다른 방들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속속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가는 장소마다 모두 이름이 있는데 전에는 지나쳐버린 이름 뒤에 숨겨진 한자도 유심히 보게 된다. 한문과 영어에서부터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까지,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번에는 긴 호흡으로 공부를 놓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최근에는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시집이 서너 권 밖에 없고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만 조금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의 언어는 잊고 있었던 말을 다시 불러온다. ‘아버지’, ‘낮달’, ‘’, ‘흰 눈’, ‘’......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낡은 말들은 제각각 시를 만나서 영혼이 생긴다. 나는 그저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일은 낯선 세계의 일, 혹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시인의 일이 이제는 아주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장숙(藏孰)의 공부에서는 낮은 말들이 오고 간다. 문밖을 조금만 나서면 들리는 익숙한 말 대신, 낭독(朗讀)을 하고, 이론(理論)을 익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진심이나 변명의 말이 아닌 대화와 현명하게 응하기를 통해 말의 길을 내고, 다시 더 낮게 몸에 내려앉히기 위한 생활의 공부를 지난 1년간 배웠다. 여전히 내 말은 나를 넘어서지 못하고 변명이나 호오(好惡)에 휘둘리지만, 말의 공부가 내어주는 새로운 길을 따라 몸을 옮기고, 그 바뀐 몸-생활양식이 가져다주는 다른 삶을 희망해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유명한 명제처럼, ‘유일하게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얻는 데있다. 아니, 눈이 아니라 새로운 손이며, 손이 아니라 새로운 발이다2)








1)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임홍빈 홍혜경 옮김, 열린책들


2)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