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유의 시작은 ‘정인이사건’부터였다. 7개월된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의 지속적 학대로 인해 2년을 살지 못하고 숨진 정인이 소식에 먹먹해진것이 그 시작이었고 혐오와 분노로 읽어내린 소식들이었다. 그 사건안에 일어난 여러 개입들과 또 다른 개입들, 얽히고설킴 속에 힘이 없는 정인이는 참으로 애잔하다. 그 혐오와 분노의 손가락을 다시 내게로 돌려보려한다. ‘약함’을 혹은 ‘약하게 되어버린’ 것을 향한 나의 시선말이다.
약한 존재를 통해 스스로의 강함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숨길수 없는 (약한)강자들의 증상이다. 그중 안타까운 것들은 언제나 ‘순수함’ 인데 처음엔 사랑이었다가, 복잡한 환경들과 익숙함에 먹혀버린 환상이었다가, 그림자처럼 증오와 억울함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한계 속 선택의 책임을, 쏟아내는 화살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도 약자의 몫이니 언제나 약자는 할말이 많다. (물론 약자가 그 고통을 삼키며 면역을 가지게 될 수 있다는 말은 잠시 접기로한다)
가톨릭 사제였던 헨리나우웬은 ‘아담’을 통해 예수와 제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헨리나우웬은 예일, 노르트담, 하버드대에서 교수직을 지내고 토론토 라르쉬 공동체에서 지체장애자들을 도우며 지냈다. 아담은 모든것을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신체적으로) 약한 존재였다. 헨리나우웬은 나중에 그를 친구요, 스승이요, 인도자라 말하며 그와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언어를 이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출산과 육아가 생각났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를 만나면서 자꾸만 드러나는(건드려지는) 자신의 미숙함(약함)을 견뎌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누구에게나 있을 약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의 약함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걸까, 그들의 약함을 거울삼고 있는건 아닐까, (내손에 들린 돌 하나가 보인다) 또한 동물, 식물, 나아가 사물을 만났던 시간 속 나의 태도가 스쳐간다.
가장 약한 사물을 시작으로 나의 약함까지도 탐구해 갈 수 있지 않을까. 내안의 약함을 사유해본적이 있었던가. 타자로부터 ‘건드려지는’(건드려질수밖에없는) 약한부분을 다루는 나만의 방식이 있던가. 약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전체를 폐쇄할 때가 있던건 아닌가. 어쩌면 스스로 지킬수 없다는 생각으로 약함을 강조하며 약자의 자리만 찾아 다녔던건 아닐까. 오늘도 질문 뿐이다.
‘무지’를 딛었기에 보이는 풍경같은 것이 있을까... (인지의 순간에도 무한한 무지를 망각하면서)
‘인지’할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일한 기쁨이자 슬픔이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