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회 속속 별강 지린
弋不射宿(잠든 새는 잡지 마)
냉장고에서 계란을 하나 꺼내, 껍질을 깨뜨려 요리를 해 먹으려고 하기 직전인데, 문득 손안의 계란에게 사로잡혀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손바닥의 계란을 한동안 바라보며 감탄했지요. 계란은, 알은, 최선을 다해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인 형식의 알은, 내가 전혀 상관할 수 없고, 상관될 수 없는 까닭으로, 단절되어, 완전한 형식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알은, 그 자체로는, 마치 잠든 것처럼, 살아 있다고도 죽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불안전한 존재로서, 안전한 타원형의 구체(球體)였습니다. 저는 순전히 그 형상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하다.” 이런 문장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계란은 차가웠습니다.
어렸을 때 닭이 갓 낳은 계란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닭들은 짚더미를 오묵한 둥지처럼 만들어 깔고 앉아서 거기에 알을 낳았습니다. 이때의 일은 이제 아득합니다. 분명한 기억은 거의 없고, 닭과 알과 마당과 짚더미와, 알을 찾아다니며 거기 있던 나도 이제는 사라졌지요, 그나마 지금 제게 분명한 것은 두 가지, 이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적어 놓게 되는 서너 줄의 문장과, 그때 손안에 깊숙하게 스며들어가서 그 뒤로 오랫동안 되풀이 되어 경험하게 되는 갓 나온 알의 온기입니다. 이 온기는 ‘숨’처럼 형상이 없는 것이지만, 작고 온유할 뿐이지만, 신기하게, 분명하고, 때로는 온 존재를 보듬어줄 정도로 커지기도 합니다.
시독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弋不射宿”이란 말을 듣고, 선생님은 이 말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 잠든 새는 잡지 않는다, 라는 공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공자라는 한 사람이, 어느 날 어떤 순간에 “弋不射宿”이라는 말을 하거나, 그렇게 행위 하였다고 말해지는 시절로부터, 공자와, 그 때의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진 다음에도,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 말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품어서 전해주는 공자의 원대한 사람의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온기의 한 자락이 내 마음으로도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능했습니다.
잠든 새는 잡지 말아야 합니다. 잠든 새, 그것은 사람의 경계입니다. 잠든 것 너머로 갈 수 있는 의식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살(弋)을 잡은 사람은 돌아서서, 잠든 것 너머에서 솟구쳐 오르는, 살아 생생하게 날아오르는 새들을 잡아야 합니다. 상투(常套)를 벗으면서 신생(新生)하며 비상(飛翔)하는 한 마디 말처럼, 솟아오르는 새들, 이것이, 사람이 주살질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잠든 새는 잡을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속에서만 가능하고 잠든 세계가 그 삶을 옹위하고 있습니다. 잠든 새는, ‘숨’ 과 ‘온기’만 있습니다. 잠든 새는 살아 있는 새의 가능성이자, 현묘한 존재입니다. 빛을 비추어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어스름함으로, 현혹하는 존재입니다. ‘숨’은 의식과 몸의 통로이자 두 지역을 맺어주는 움직임일 뿐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곳에는 잡을 수 있는 새가 없습니다. 성인은 원대한 측은지심으로 사람들을 향해 말하거나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쪽으로는 가지 말아야 돼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