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숙에서의 공부가 내 삶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가>
簞彬
우연찮게 걸음한 속속의 청강, 청강이 청강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공부의 시작점이 되었다. 어떠한 확신 아래 공부를 해보기로 결정하였지만 초기의 나는 혼란을 겪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첫번째 관문이었다. 외국어도 아닌, 40년을 넘게 써오고 있는 우리말임에도 귀설었다. 1년은 무조건 들어보라는 한 선배숙인의 말을 새기며 그냥 듣자, 무조건 듣자라며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채근하는것을 멈출 수 있었다.
詩를 배우고 茶를 배우지만 그것 또한 생소한 일이다. 아득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냥 이행할 뿐이었다. 오래도록 책을 읽어왔지만 장숙에서 다루는 교재는 그간 읽어오던 책과 부류가 달랐다. 그로 인함인지 아님 내가 선택한 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나름의 저항이 생기는것인지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두세번을 읽고 부분 필사를 병행하며 이해를 도우려했지만 K님과 선배숙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내가 생각도 못한 말들이었다. 발버둥쳐왔던 지난 삶을 돌아보며 무엇을 하며 살아왔나, 나름의 애씀이 부질없어 보이며 그간의 생활을 부정하게 되면서 혼란은 가중되기도 했다.
장숙에서 나는 무엇을 공부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고, 이 공부를 어떻게 내 생활에 안착시킬 것인가를 자주 고민했다.
사린의 윤리중에서 사물과의 관계는 장숙공부를 시작하기 이전 k님의 별음을 통해 공부하게 되었다. 사물과의 관계라, 집안 물건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으며 아울러 사람과의 관계를 한번 더 돌아보게 했다. 사물과도 관계를 제대로 맺으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한 가정내에서 특히나 배우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남편과 부딪히는 지점은 내가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도약대가 되기도 한다. 그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면 공부마저 막힌다는것을 잘 알기에 지혜롭게 넘어서는것을 과제로 삼는다. 에고가 가장 번성하는 그 지점, '자기 변명을 삼키고 오연한 자기를 깍아 나갈때 영혼이 지하수처럼 방울 방울 샘솟는다'(자본과 영혼, k님)는 경험을 여럿 차례했다. 지는 싸움으로 보이지만 언제나 이길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다. 남편을 적으로 삼는 대신 연대를 맺어 내 공부길에 조력자로 삼고 있다.
나태함에 젖어 허우적거릴 때 나에게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것은 서글픈 일이다. 내 삶에 아무런 개입이 없기에,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하니 외로운 싸움이 되기도 한다. 장숙에서의 공부는 생활을 치는 것들이다. 하지 않던 것을 하게 한다. 의기소침하여 뒤로 물러나 조용히 있던 내게 무엇을 하겠끔한다. 없던 자신감을 생기게 하고 죽어있던 의욕을 끌어올린다. 다 먹어 치우려 지나친 욕심을 부려 탈이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하나씩 소화를 시키며 먹어 나갈 줄 알게 되었다. 요통환자에게 긴요한 달리기를 K님은 여러 차례 권면하셨지만 이유없는 저항감을 느꼈다. 서너시간도 거뜬히 걸어내지만 단 5초만이라도, 달린다는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동일한 말을 여러 차례 들어왔는데도 그간 들리지 않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들려왔다. 달려야만 한다는 강한 뭔가가 나를 치고 들어왔다. 달리기의 요령을 익히게 되었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할 수 없던 것을 하게 되면서 기능이 하나 추가되었고 그것은 꽤 큰 쾌를 느끼게 한다.
내 말과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느낀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공부과정을 통해 그것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답답함을 알면서도 낭독은 내 생활 가운데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하고 말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절실함이 다가왔다. 나를 상대로 실험을 해보고자한다. 말과 글을 배움으로 막힌 정신의 길을 뚫어내어 시원스레 나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며 어떻게 채워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중에 또 하나 깨친것은 아이의 학습 습관과 관련해서다. 지난 일여년간 아이의 학습도우미 역할을 하면서 장숙에서의 공부를 자주 끌어다 적용했다. 아이의 학습을 도우며 아이와 싸우는 대신 나 자신과 많은 싸움을 해왔다. 부모가 제 자식을 가르칠 수 없다는 통념을 깨고자 했고, 내 공부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아이가 자기주도학습을 해나갈 수 있도록 끌어가는데 일조했다. 눈에 보이는 변화를 보면서 장숙에서의 공부가 나 하나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 슛은 100% 빗나간 것과 마찬가지"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라는 글귀를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았다.장숙에서 K님을 통한 어떤 가르침이 들어올 때마다 뜨거운 뭔가가 올라온다. 그것이 거기에서 끝난다면 빗나간 슛일 뿐이다. 단 1%의 가능성이 있다면, 내게 공부의 계기가 된다면 실험대위에 기꺼이 나를 놓아본다. 무엇이든 공부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내 뻔뻔함이 혹여나 숙인들께 폐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일기도 한다.
장숙에서의 공부를 하게 된게 10개월째 접어든 지금, 이제는 어느 정도 공부가 내 생활 가운데 안착된 듯 하다. 그럼에도 작은 버성김은 여전히 있는 것이고 그런 중에 조금씩 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에 대한 배우는자로서의 태도, 동학으로서의 제 역할을 살피며 적절한 부담을 갖고 공부에 임하며, k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에 걸맞게 공부의 실효로 나 자신과 이웃을 밝히는 희망을 품고 새해의 공부를 시작하고자 한다.